버닝 각본집
오정미.이창동 지음
아직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버닝은 명확히 사건들을 설명하지 않아서 더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영화로 유명했던 것 같다.저번에 헤어질결심 각본을 읽고도 느꼈던 것이지만 인물 간의 미묘한 감정을 글로만 읽어보는 것은 시각적, 연출적인 표현이 없어서 더욱 큰 상상의 여지를 주는 것 같다. 당분간은 버닝의 영화 버전을 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데 나는 열린 결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안 볼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 세 인물 종수, 해미, 벤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과 감정의 흐름을 표현한 대사들이 기억에 남는다.종수는 혼란과 의심이 가득한, 해미는 불안정한 내면을 가진, 벤은 신비롭고 냉철한 매력을 지닌 캐릭터이다.이해할 수 없는 대상의 여유로움과 비밀스러운 매력에 위축된 종수의 '정말 그런 걸 태운다고?'라는 질문이나, 해미에게 상실감과 애정을 표하며 무력하게 '왜 나한테 연락을 안 했어?'라고 질문하는 부분에서 그런 면이 더 잘 와닿았다.해미는 종수와 벤 사이를 오가며 방황하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미 배우가 전종서라는 것을 알아버린 시점에서 그림이 너무 잘 그려진다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오묘하고 조금은 추상적인 대사도 더 잘 그려졌던 것 같다.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태운다고 상상해봐. 모든 게 사라지는 거야." 라는 말이 특히나 추상적이었다. 세상에 없는 것을 태운다니.. MBTI N 80프로 이상인 나도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전종서 배우가 연기하는 것을 생각하니 그녀의 상실감과 외로움이 오롯이 느껴졌다.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걸 나는 다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벤의 말에서도 어떻게 이렇게 섬찟하면서도 여유롭게 냉소적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렇듯 대사를 통해 인물들을 또렷하게 보여주되, 미니멀리즘적인 표현 방식과 모호함을 강조하는 각본의 구성을 통해, 많은 답을 주지 않고 해미의 실종이나 벤의 정체를 상상하게 한 점이 신비로운 각본이었다. 북클럽 멤버들과 함께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그 해석을 공유해보면 재밌을 것 같다.
오리지널스 : 어떻게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이는가
그랜트, 애덤
<독서 기록>https://www.notion.so/4a5755c21beb425495dd600a45265769?pvs=4 오리지널스 독후감‘당신은 창의적인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 창의적인 사람을 떠올리라 하면, 대부분 위대한 기업가, 발명가, 과학/공학자처럼 몇 안되는 특별한 사람들이 떠오를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뛰어난 창의성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라 확신한다. 겉으로는 ‘난 저들과 같은 비범한 능력을 타고나지 못했고, 저들과 달라’ 라며 쿨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속으로 ‘난 왜 저들과 다를까….’ 좌절하며,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는 당신. 주눅이 들어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는 당신에게 조심스레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물론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갑자기 없던 아이디어가 샘솟거나, 사고 회로가 빠르게 돌아가는 건 아니다. 그저 ‘창의성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가까이 있음’을 일깨워줌으로써 당신에게 일종의 가능성과 희망을 선사할 뿐이다. 물론 영화 <버드맨>의 주인공처럼 ‘과거의 영광(나는 고2~고3 기간의 내가 창의적이었다고 생각한다.)’을 추억하며 재귀를 꿈꾸는 나에게 책이 선사하는 가능성과 희망은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 이러한 감사함을 표하며, 총 8개의 장 중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몇 개를 소개하며 글을 이어가겠다.많은 사람들이 독창성을 발휘 하는 데 실패하는 이유는 몇 개의 아이디어만 생각해내고, 그것을 완벽해질 때까지 다듬고 수정하는 데 집착하기 때문이다.-78p우선 첫 번째 장의 ‘위험 포트폴리오 관리하기’가 인상적이었다. 매사에 소신 있고, 자신감 있을 게 행동할 것 같은 혁신가들의 속마음을 잘 보여준 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기 전까지 의심하고,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실. 혹여나 실패 했을 때를 대비하여, 미리 안전망(출구)까지 철저히 설치해둔다는 사실. 괜스레 나와는 다른 종족 같았던 이들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역시 ‘두려움’과 ‘회의감’은 모든 인류의 보편적 감정인걸까. 그러나, 그렇게 밀려오는 두려움과스스로에 대한 회의감을 모두 극복한 채 떠오른 아이디어를 결국 현실로 실현하는 이들의 용기를 생각하면… 도대체 그토록 큰 용기의 근원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독창적인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두려움을 느끼고 회의를 품는다. 그들이 우리와 다른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용기를 내서 행동에 옮긴다는 점이다. 독창적인 사람들은 하다가 실패하더라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는 시도하는 것이 후회를 덜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61p이 궁금증에 대한 답은 일종의 순환 논리를 도출한다. 그들이 큰 용기를 낼 수 있는 까닭은 결국 그만큼 꼼꼼하고 완벽하게 안전망을 설치하는 데서 형성되는 큰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안전망을 설치하는 행위는 다시 두려움과 회의감에서 비롯된다. 이 논리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결국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이란 곧, 파도처럼 밀려오는 두려움과 회의감을 역이용하여 ‘파력 발전소’를 만들어내는 과정과 같은 것 아닌가 싶다.가장 성공한 창시자들은 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뛰어들고 보는 막무가내형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절벽의 끝에서 마지못해 조심조심 발을 딛고, 낙하 속도를 계산하고, 낙하산이 제대로 작동할지 세 번 정도 점검하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절벽 바닥에 안전망을 설치한 후에야 뛰어내리는 사람들이다.-54p돌이켜 보면 그렇다. 나의 경우도, 심리적인 압박감이 거의 없고 마음에 여유가 있었을 때 가장 참신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내 글 중에서 가장 참신하다고 생각하는 건 ‘세포들의 MBTI’라는 칼럼과 ‘원캐릭터’라는 중단편 소설인데, 전자의 경우는 고3 때 1학기가 끝난 후 여름 방학 때 쓴 글이고, 후자는 대학 입시까지 다 끝난 후 겨울 방학 때 쓴 글이다. (두 글 모두 블로그에 업로드 되어 있다.) 즉, 두 글 모두 심적으로 가장 여유로운 시기인 방학 때 쓴 글이다. 에세이 공모전이나, 독후감 숙제처럼 글을 잘 못 쓸 경우 발생하는 ‘실패’라는 게 특별히 없어서 였을까. 힘들면 언제든지 빠져나갈 출구가 있다는 데서 오는 든든함 때문이었을까. 두 글을 쓸 때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넘쳐 났던 것 같다. 물론 안정감에서 비롯된 용기도 충분했기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머릿속에만 방치하지 않고 글에 잘 녹여내는 능력도 충분했다. 그러고 보면, 그때보다 훨씬 여유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 같은 지금의 나는 왜 이토록 글쓰기가 두려운 건지. 거센 파도를 역이용한 파력 발전소 짓는 방법을 망각해 버린 걸까. 파도만 보면 그저 도망치거나, 몸을 숨기기에 바쁘다. 이러한 태도가 실질적인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 데서 기인하는 건지, 아니면 ‘과거의 나’에게 느끼는 일종의 경쟁 심리 혹은 부담감에서 기인하는 건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만약 전자와 같은 이유(실질적인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 상황) 때문이라면, 책의 4장에서 소개하는 ‘전략적 지연’이라는 방법이 창의성을 향상 시키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서두르면 바보’라는 4장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어떤 창의적인 일을 수행할 때, 너무 서두르지 말고 전략적으로 지연할 것을 제안한다. 마치 오크통에 숙성하는 기간이 길어질 수록 맛과 풍미가 풍부해지는 위스키처럼, 아이디어도 머릿속에서 곱씹어 생각하는 기간이 충분히 주어질 때 비로소 완성도와 독창성이 훌륭해진다는 것이다.미루는 행동은 위험해 보일지 모르지만, 적당한 때를 기다리면 위험을 분산시키기 때문에 실제로는 위험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반드시 선발 주자여야 독창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가장 성공한 독창적인 인물들이라고 해서 늘 예정된 계획을 고수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다른 일에 정신을 팔면서 아이디어 실행을 미루고 미루다가 대박을 터뜨리곤 한다.-168p나는 작년 겨울학기 때부터 이 전략을 은연 중에 깨달아 잘 사용하고 있는데, 후술할 조건만 갖춰진다면 무척 유용한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에세이나 특정 도전 과제를 받았을 때, 곧바로 달려들어 그 과제를 수행하려 애쓰기 보다는 일단 한 박자 쉬고 과제가 있다는 사실만 머릿속에 입력해둔다. 이후, 제출 마감 2~3일 전까지는 머릿속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거나, 그것을 바탕으로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곰곰이 생각만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연약했던 아이디어가 단단하게 굳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때부터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행동으로 옮기면 된다. 이러한 전략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아래와 같다.작업의 완성을 미루면 참신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낼 시간을 얻을 수 있다는 이점 외에도, 또 다른 이득이 있다. 즉흥적인 사고를 하게 해준다. 미리 계획을 세우면 이미 만든 구조를 고수하기 일쑤여서, 우리의 시야에 갑자기 등장할지 모르는 창의적인 가능성을 배제하게 된다.-177p다만, 위에서 언급 했듯이 나는 ‘전략적 지연’이라는 저자의 제안도 특정한 조건이 갖춰졌을 경우에만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전략이 적용될 수 있는 과제도 글쓰기나 작곡, 기획처럼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의 경우로 한정해야 한다. 즉, ‘기계적이고 습관적인 일들 예컨대 ‘리뷰 논문 20p 읽기’나 ‘간단한 공식만 적용하면 풀 수 있는 과제’ 등에 이 전략을 적용하는 건 다소 위험한 선택일 수도 있다. 할 일이 많다는 데서 오는 압박감이 아이디어의 숙성을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험 상 이 경우는 두 과제 모두 만족스럽지 않은 최악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나는 창조적인 일들을 마음 편히 수행할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기계적이고 습관적인 일들은 서둘러 해결하는 게 더 효율적인 방법이라 생각한다. 이는 ‘위험 포트폴리오’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기계적이고 습관적인 과제들만 서둘러 해결하고 나면, 마감 기한 전까지는 달콤한 사탕을 입에 넣고 굴리듯이 여유롭게 머릿속 사고의 흐름을 즐길 수 있으리라.젊은 천재에게는 단거리 경주가 좋은 전략이지만, 노련한 거장이 되기 위해서는 참을성 있게 실험에 매진하는 마라톤 주자의 끈기가 필요하다. 둘 다 모두 창의력을 발휘하는 길이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기발한 생각이 번뜩 떠오르지 않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천천히 꾸준하게 실험을 계속하는 것이 독창성을 오래도록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이다.-196p앞서 나는 기계적이고 습관적인 일들은 그것이 ‘강박’과 ‘불안감’을 유발하지 않도록 서둘러 해결하는 게 좋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 장인 ‘평지풍파 일으키고 평정심을 유지하기’에서 저자는 오히려 이런 불안감이 어떤 일의 성과를 더 높이는 좋은 원동력이 된다고 주장한다. 언뜻 보기엔 저자의 이 같은 주장이 ‘일을 미뤄서 불안감을 키우면 성과도 높아진다’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인과관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는 비관주의자들은 오히려 불안감이 극심하기 때문에 일을 미루지 않는다. 그리고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에 대비하여 꼼꼼하게 안전망이나 출구를 설계한다. 즉, 이들은 독창적인 생각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용기의 원동력, 안정감을 심리적 안정감을 ‘위험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는 데서 찾는다. 엄습하는 두려움과 불안감에 좌절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일단 뭐든 실행하겠다 마음 먹으면, 비관주의는 오히려 일의 성과나 독창성을 높이는 좋은 조력자가 된다는 뜻이다. 여기에 창조적인 일과 기계적인 일을 분리하는 분별력이 더해지면 어떨까? 비관주의적인 태도는 기계적인 일을 더욱 서두르되 완벽하게 수행하도록 도울 것이며, 이는 창조적인 일에 대해 고민할 시간을 확보해줄 것이다. 또한, 이들은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기에 마감 기한 전까지 제출은 미루되, 그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아이디어를 열심히 다듬을 것이다. 이토록 치열하게 고민하고, 설계한 과제인데 완성도나 독창성이 높은 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구체적으로 특정한 행동을 하겠다고 결심한 상태가 아니라면 방어적인 비관주의자처럼 생각하는 것이 해로울지도 모른다. (중략) 이 경우에는 낙관적으로 생각해야 의욕이 생기고 동력 장치를 힘껏 밟게 된다. 그러나 일단 어떤 행동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상태에서 불안감이 엄습해오면 방어적인 비관주의자처럼 생각하고 불안감을 직시하는 것이 훨씬 낫다.-363p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관주의자처럼 살고 싶진 않다. 이들처럼 살면 본인들이 낸 성과에 만족 하지도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아무리 독창적이고, 세계를 뒤흔드는 아이디어를 낸다 한들, 내가 그 아이디어를 냈다는 데에 만족감이나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전구나 스마트폰처럼 세상을 좌지우지할 만큼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못 내더라도, 오늘 생각해낸 소소한 아이디어에 충분한 보람과 성취를 느끼는 게 더 행복한 삶이 아닐까 싶다.
아웃라이어
글래드웰, 말콤
<독서 기록>https://www.notion.so/dfd323fc6f4149069fb1c97f795ef385?pvs=4 아웃라이어를 읽고소설도 아니고, 자서전도 아닌 기사 형식의 글이 이토록 재밌고, 술술 읽힐 수 있다니… 흡인력이 대단하고 얻어갈 교훈도 풍성한 말콤 글래드웰의 저서, 그중에서도 단연코 가장 유명한 ‘아웃라이어’는 정말이지 완벽에 가까운 책이었다. 보통 이런 종류의(저자의 주장이 한 두 가지로 명확한 책들)은 뒤로 갈수록 했던 주장이 반복되는 느낌이라서 흥미와 몰입감이 크게 떨어지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각 에피소드의 주장은 하나로 수렴함에도 불구하고, 사례 자체가 눈길을 끌고 그것으로부터 이끌어내는 결론이 워낙 참신했기 때문이다.글래드웰은 이 책을 통해 ‘성공한 사람’, ‘천재’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타고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지능과 같은 선천적 능력이 아무리 타고나도, 그들에게 주어지는 초기 조건이 성공에 적합하지 않거나, 그들이 인생에서 행한 수많은 선택의 방향이 조금이라도 달랐더라면 현재와 같은 ‘성공한’ 그들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태어난 날짜/연도부터 유아기 시절 집중 양육의 유무, ‘벼농사 문화’에서 비롯된 특유의 성실함까지. 사례를 따라 책을 쭉 읽다 보면, 저자의 주장에 자연스레 공감하게 된다. 우리는 초기 조건에 따라 그 특성과 형태가 천차만별인 미분방정식의 해와 같다. 나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만약 내가 작년 여름에 ‘체력 육성’이라는 강의를 듣지 않았더라면, 웨이트 운동은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카이스트에 가면 군대를 안 가도 된다’라는 인터넷 기사?(부모님의 말씀)를 읽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지금과 전혀 다른 대학에 다니고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대한민국이 아닌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면, 적어도 피부색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어쩌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처럼 우리가 매 순간 행하는 선택에 따라 인생이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평행 세계가 무수히 가지를 뻗쳐 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우리는 이 책을 통해 성공을 예측 가능한 경로를 통해 달성된다고 배웠다. 가장 똑똑한 사람이 성공하는 게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크리스토퍼 랭건은 아인슈타인과 같은 반열에 서야 한다. 그렇다고 성공이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결정과 노력의 산물로만 이뤄진 것도 아니다. 성공은 주어지는 것이다. 성공하는 사람은 기회를 얻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그 기회를 움켜잡을 힘과 마음자세가 있었다.-306p저자의 주장대로 성공하는 사람이 ‘초기 조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끼거나 자책할 필요가 없다. 내가 그들보다 절대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나한테 주어진 조건이 좀 부족했던 거라고 위안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위안’이 앞서 말한 부정적인 감정을 몰아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합리화’와 ‘분노’로 변질되거나 심화될 경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나는 저자의 주장을 잘못 이해할 경우, 전자와 같이 본인 인생의 모든 것(특히 실패)을 ‘초기 조건’이 잘못된 탓이라 합리화하는 태도가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합리화는 그 순간의 고통을 잊게 해주고, 안락함만 남기는 강력한 진통제와 같다. 하지만, 진통제는 치료제가 아니다. 매 순간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속절없이 시간을 흘러 보내는 행위는 일종의 진통제 중독 현상과 같다. 중독은 고통과 그 뿌리가 같기에, 결국 필연적으로 고통을 몰고 올 수 밖에 없다.우리는 문화와 역사, 개인을 둘러싼 외부세계가 전문적인 영역에서의 성공을 얼마나 좌우하는지는 물론 좋은 파일럿이 되기 위한 조건도 알고 있다. 하지만 비행기를 산중턱에 들이받은 조종사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가혹하게 내던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로부터 성공을 이끌어내는 길을 찾아야 한다.-254p성공이 초기 조건, 곧 기회의 영향을 많이 받음을 알았다면, 스스로를 합리화 하거나 세상에 분노하기 보다는 그 ‘기회’라는 것을 인식하는 센서/필터의 성능을 기르는 게 어떠한가? 택배 보관함에 상자가 얼마나 와있는지, 각각의 상자 안에 든 게 약인지 독인지 정도는 구별할 줄 알아야 내용물을 움켜 잡든 말든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센서/필터 성능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나는 스스로에 대한 ‘자문자답’을 꾸준히 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뭘 할 때 몰입과 기쁨을 느끼는지, 앞으로 뭘 하면서 살고 싶은지, 내 성격은 어떠한지 등의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다 보면, 자연스레 1~100까지의 숫자 중에서 ‘소수’만 걸러내는 능력이 길러질 것이라 확신한다.안타깝게도, 나의 경우는 위와 같은 ‘자문자답’을 할 시간이 나이를 먹을 수록 줄어드는 것 같다. 대신에 갈수록 학문이나 타인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후자의 경우가 전자의 경우보다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나 자신에게 자문자답할 시간이 줄어들고 있는 이유가 삶을 여유 없이 강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인 것 같아 씁쓸할 뿐이다.
돈의 심리학 : 당신은 왜 부자가 되지 못했는가
하우절, 모건
<독서기록>https://www.notion.so/e1da4e4f82c74d5d897e549ebaf22993?pvs=4 ‘심리학’이라는 키워드와 달리 이 책은 기대했던 만큼 돈과 얽힌 심리적 메커니즘을 깊게 다룬 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나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하면 부를 쌓을 수 있는가?’ ‘왜 부를 쌓아야 하는가?’와 같은 ‘돈’과 관련된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 대하여, 저자는 깊은 통찰이 돋보이는 답을 내보였다. 이 책은 총 20개의 세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솔직히 2~3개의 에피소드는 같은 메시지를 다른 방식으로 전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기에, 이 책이 주는 메시지 중에서 가장 감명적이었던 몇 개를 추려서 좀 더 자세히 감상을 기록해보겠다.우선 이 책을 통틀어 가장 마음에 들었던 문장 하나를 인용한다.원하는 것을, 원할 때,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만큼 오랫동안 할 수 있는 능력은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이다. 이는 돈이 주는 가장 큰 배당금이다.-140p이는 행복의 개념과도 연결되는데, 저자는 행복을 ‘나에게 삶에 대한 통제권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이와 같은 저자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특히 겨울방학 때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읽은 후, 이 같은 생각이 더욱 견고해진 것 같다. 우리가 좋은 직장을 구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최근 내 또래 세대 사이에서 스타트업 열풍이 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단 당연히 돈을 벌기 위함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돈을 버는가? 언젠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것을 경험하기 위함 아닌가? 즉, 직업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돈은 보다 ‘주도적’인 삶을 일궈 나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저자 로버트 기요사키는 ‘돈이 돈을 만드는’ 방법을 찾으라 조언하는 것이다. 노동자가 되어 임금을 받으며 일하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다면, 굳이 노동자라는 직책을 선택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물론 돈이 돈을 만드는 방법은 무척 찾기 어려울 것이다. 애당초 이 방법을 누구나 따라할 수 있었다면, 자본주의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젠가 이 방법을 깨우치고 싶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안정감’을 느껴보고 싶다.“사람들은 자신에게 통제권이 있다고 느끼고 싶어한다. 다시 말해 운전석에 앉고 싶어한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뭔가를 시키려고 하면 그들은 힘을 뺏긴 기분을 느낀다. 스스로 선택을 내렸다기보다 우리가 그들의 선택을 대신 내려주었다고 느낀다. 그래서 원래는 기꺼이 하려고 했던 일조차 싫다고 하거나 다른 짓을 한다.”-143p한편으로는 그렇게 원하는 모든 것을 내가 원할 떄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만큼 할 수 있는 특권이 나에게 주어진다 한들. 즉, 내 삶을 100% 원하는 대로 컨트롤 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 한들. 과연 진정으로 우리 인간이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낄지 의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때때로 느끼는 행복감은 불행했던 나날들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즉, 행복이란 감정은 그와 반대되는 감정이 있을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생기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삶에 대한 통제권을 쥐었을 때도 아니라면, 도대체 우리는 언제 진정 행복해질 수 있을까.이후 이 책은 여러 장에 걸쳐서 ‘저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실 저축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제대로 실천하기가 어려울 뿐. 저축은 왜 그토록 실천하기가 어려운 걸까? 개인적으로 그 이유는 돈이라는 게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현금을 말하는 게 아니다. 돈이라는 개념 그 자체를 말한다.) 물론 오랜 세월에 거친 사회적 합의 덕분에, 우리는 돈을 잃으면 ‘손실 회피 반응’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을 입은 옷 하나 버리기 아까워 하는 사람이 레스토랑에 가서 고급 스테이크를 일시불 결제하는 걸 보면, 확실히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현대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성공한 척 흉내 내도록 도와주는 것을 하나의 산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사실 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부는 구매하지 않은 좋은 차와 같은 것이다. 구매하지 않은 다이아몬드 같은 것이다. 차지 않은 시계, 포기한 옷이며 1등석 업그레이드를 거절하는 것이다. 부란 눈에 보이는 물건으로 바꾸지 않은 금전적 자산이다.-163p이유가 어찌 되었든, 이 책의 말 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저축을 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자는 어떤 노력을 했길래 그토록 저축을 잘 하는 걸까? 나와 다른 특별한 마음 가짐이나 목표가 있는 걸까? 그러나, 저자는 이 같은 질문에 대하여, 우문현답을 제시한다. 속된 말로 ‘무지성 저축’을 하라는 것이다. ‘30대에 집 사기’나 ‘25세에 차 사기’와 같은 구체적 목표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냥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저축하는 것. 저자는 그것이 바로 저축의 왕도라고 한다.구체적 목표를 위해서만 저축하는 것은 예측 가능한 세상에서나 합당한 얘기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측 가능하지 않다. 저축은 최악의 순간 우리를 기절초풍하게 만들 수 있는 불가피한 가능성에 대한 대비책이다.-177p돌이켜 보면, 비단 저축 뿐만이 아니었다. 공부도 그랬다. 나 역시 예전에는(어쩌면 지금도?) 먼 미래에 내가 입학할 학교, 내 직장 등을 생각하며 공부를 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면, 어쩔 때는 가슴이 벅차오르고, 공부를 해야겠단 의욕이 생겼다. 그러나, 또 다른 때에는 오히려 현재의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면서, 합리화를 하게 되었다. 괜히 미래에 대한 고민과 걱정만 늘어가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스스로의 목표와 능력을 합리화 하고 나면, 마음가짐은 흐트러졌고, 집중도 잘 안되는 역효과가 발생했다. 이 또한, 어느 순간 발견한 최고의 공부법은 ‘무지성 공부법’이었다. 그냥 먼 미래를 바라볼 필요 없이, 하루하루에 충실히, 아무 생각없이 공부하는 것. 그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공부하는 방법이었다.많은 사람들은 평생 동안 워낙 많이 변하기 때문에 수십 년간 같은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비슷한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돈은 80년짜리 수명 하나가 아니라, 아마도 20년 단위의 네 개 수명을 가질 것이다.-246p마지막 쳅터 몇 개에 걸쳐서 이 책은 ‘허구를 믿으려는 인간의 본능’에 대해 서술한다. 어떻게 보면,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에서 다루는 내용과 유사한 부분이다. 즉, 우리는 스스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세상을 완벽히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지식과 인식의 범위를 지닌 채 살아가기 때문일까? 부족함에서 기인한 불안감이 우리를 더욱 더 ‘허구’와 ‘착각’에 빠져들도록 부추기는 걸까?인생에는 우리가 사실이길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사실이라 믿는 것들이 많이 있다. 나는 그런 것들을 ‘매력적인 허구’라고 부른다. 매력적인 허구는 우리가 돈을 생각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311p세상에 관한 관점은 누구나 불완전하다. 우리는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스토리를 만들어낸다.-316p특히 투자는 더욱 그렇다. 애초에 내 경험만 돌이켜 봐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 ‘내 선택이 무조건 맞을 것이란 착각’은 이성적인 사고를 무력화 하고 자만심을 초래했던 것 같다. 이런 현상은 수중에 현금이 생길 때, 더욱 심해진다. ‘이 돈을 주식에 투자하지 않고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게 맞나? 이러다 뒤쳐지면 어떡하지?’와 같은 불안 심리는 내 확증 편향적인 사고를 자극한다. 그렇게 종목을 발굴한다는 이유로, 이 기업 저 기업 찾다가 마음에 드는 기업 하나를 발견한다. 재무제표를 읽는데, 수치가 나쁘지 않다. 이러면 보통 RIM으로 대략적인 적정 주가를 계산해봐도 ‘매수’ 신호가 나온다. 그래프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해당 기업 관련 뉴스를 찾아봐도 무언가 다 좋아 보인다. 결국 내일 그 기업의 주식을 사기로 결심한다. 이 같은 결정을 내리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길어봤자 40분 밖에 되지 않는다. 재무제표 살펴보기라는 나름의 검증 단계를 통과하기만 하면, 해당 기업과 관련된 모든 정보는 무척 좋아 보인다. 물론 아직까지는 이 같은 직관?과 속단이 좋은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렇지만, 늘 맞을 순 없기에 이 기회에 한번 투자에 있어서 ‘숙고’하는 훈련을 강행 해보고 싶다.경기침체가 다가온다고 생각해서 미리 주식을 현금으로 바꿨다면, 경제에 대한 당신의 시각은 당신이 일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일 때문에 갑자기 왜곡될 것이다. 사소한 소동이나 목격담 하나도 마침내 올 게 왔다는 신호처럼 보일 것이다. 실제로 그래서가 아니라 당신이 그걸 바라기 때문이다.-316p
버닝 각본집
오정미.이창동 지음
<독서 기록>https://evening-ostrich-c5c.notion.site/405e5fcf4acc424f8039d9b391be29ca 작년에 같은 동아리 친구의 추천으로 본 영화, 버닝. 나는 아직도 이 영화를 다 보고 났을 때 느낀 그 어리둥절하고, 혼란스러운 기분을 잊을 수 없다. 여러 영화제와 평론가들의 칭송을 받는 영화라고는 하는데, 도대체 어떤 점에서 그 많은 칭송을 받는다는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이 영화의 각본집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작년에 재밌게 본 헤어질 결심도 극장에서 영화로 볼 때와 차분하게 각본을 읽었을 때 완전히 다른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영화는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오직 ‘한방향’으로 밖에 감상할 수 없지만, 각본은 이와 같은 제약 없이 충분한 시간동안, 원하는 부분을 돌려볼 수 있기에… 버닝도 차분히 각본을 읽음으로써 영화를 볼 때는 차마 발견하지 못한 부분과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같은 나의 기대는 충분히 충족되었다. 아니, 이 두터운 각본 한권을 읽음으로써 나는 비로소 ‘버닝’을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었다.버닝은 ‘서사’가 중요한 영화가 아니었다. 감독은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혼란스러운 사회에 대한 젊은이들의 반응’과 동일시 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시 했다. 내가 영화를 보면서 느낀, 혼란스러움과 답답함 그리고 약간의 불쾌함들, 벤의 정체부터 우물의 존재 여부까지. 감독은 이 모든 감정까지도 철저히 ‘설계’했던 것이다. 이러한 감독의 의도를 알고 나니… 감탄사가 흘러나왔다.나한테는…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169p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에 ’맥락‘을 부여함으로써 하나의 연결된 서사를 완성하려는 인간의 욕구를 완전히 거스를 수 없었다. 비록 영화가 끝내 벤의 정체(해미가 사라진 이유)를 알려주지 않고, 감독도 공식적으로 영화 내에 나오는 서사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라고 했지만, 이 같은 의구심이 계속 드는 건 어쩔 수 없는지라. 다만, 버닝을 영화를 볼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가능성과 새로운 생각들이 많이 떠올랐다. 특히 벤의 의미심장한 아래와 같은 대사.난 비닐 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어요. 들판에 버려진 낡은 비닐하우스 하나를 골라 태우는 거예요. 두 달에 한 번쯤… 그 정도 페이스가 젤 좋은 거 같아요. 나한테는.-113p확실한 건, 비닐하우스를 테운다는 게 실제 비닐하우스를 테운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가 반복적으로 꽤 긴 시간을 할애하여, 인근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찾는 종수의 모습을 비춘 것도 이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영화로 볼 때도 이에 대한 의심은 없었다. 다만, 비닐하우스를 테운다는 게 해미처럼 주변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텅빈 비닐하우스 같은 여성을 조용히 납치하여 살해한다는 뜻인지, 곧 벤은 일상의 무미건조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때때로 ‘불법적인’ 행위 곧 계획된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페스 연쇄살인마인지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각본으로 읽으니까, 위와 같은 사고가 모두 우리의 ‘확증 편향’에서 비롯된 섯부른 판단 아닐까 싶었다. 아니, 감독이 이 같은 오해와 불신을 유도한 게 아닌가 싶었다. 어쩌면 벤은 살인자가 아닌, ‘구원자’였을지도 모른다.
헤어질 결심 각본
박찬욱.정서경 지음
영화를 보지 않고 각본만 읽은 것에 대하여- 확실히 각본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죽은 기도수의 시점에서 눈 위로 개미가 기어가는 것을 읽은 순간부터 장면이 상상되면서 소름이 쫙 끼치고, 이후에 계속 긴장감을 가지고 글을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그냥 단순히 형사들이 시체를 내려보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러한 장면을 영화에 포함시킬 수 있었던 건, 매 장면 전환과 구도 하나하나를 상상하며 각본을 써내려갔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서 굉장히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해서 두 주연 배우의 얼굴만 아는 채로 각본을 읽는데, 주연 배우의 얼굴조차 모르고 각본을 읽었다면, 얼마나 아름답고도 사연있게 생긴 여인과, 친절한 형사의 모습을 상상했을 지 문득 궁금했다. 책을 읽은 직후에 전체적인 캐스팅을 머릿속으로 혼자 해보고서 실제 캐스팅과 비교했는데, 내가 기존에 알던 배우분들이 많아서 이 배우가 어떻게 이 연기를 소화해냈을까 싶어서 그들의 역량에 놀랐다.- 아 그리고 매우 개인적으로, 나는 영화 속 펀치 한 방에도 눈을 가리고서 보는 개복치인데, 글로 읽으니까 매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어서 그건 참 좋았다. 분명 이걸 영화로 봤다면, 총을 쏘기 직전이나 추격씬이나 살인 현장에서의 중요한 대사들을 즐기지 못했음이 아쉬웠을 것 같다. 그 씬들에서의 대사도 참 사랑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는데 말이다. 인상적인 대사 혹은 해설1) 까마귀에게 말하는 장면 : 나에게 선물이 꼭 하고 싶다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주세요. 난 좀 갖고 싶네. / 왼쪽 가슴에 손을 얹는 해준. 심장이 찌르르.사실 각본을 읽어내려가면서, 해준의 시점에서만 서래에게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이렇게 번역기라는 매개를 이용해서 서래의 마음을 보여줄 줄도 몰랐고, 이렇게 일찍 마음이 드러날지도 몰랐다. 남은 책의 장 수를 보며, 앞으로 어떻게 사건을 전개해나갈까 정말 궁금했고, 저 ‘난 좀 갖고 싶네.’를 어떤 톤으로 연기했을지, ‘심장이 찌르르.’를 어떻게 묘사했을지 정말 궁금해졌다.2) 오른 층계 – 138층. / 상처와 물집, 깨진 손톱들.아아 진짜 정말 이 부분... 이 각본 속에서, 서래와 전화를 하는게 바로 옆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묘사되는 장면이나, 산을 타는 장면 등, 서래와 해준 사이에서 잦은 전환이 일어나는 부분은 정말 한 글자 한 글자 소중하면서도, 빨리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안달이 나는 곳들이었다. 사람이 바뀔 때마다 정말 소름이 돋았고, 그 과정에서 도수의 유투브 소리가 또 정말 큰 역할을 했을 것 같아서 세 주인공들이 이끌어가는 연기가 매우 기대가 되는 장면이었다. 특히 저 ‘138층’이라는 숫자를 봤을 때, 중간에 놓인 하이픈 길이 만큼 나도 숨을 참았다. 저 숫자와, 서래의 것과 똑같이 생긴 상처와 손톱들을 직접 두 눈으로 보면서 오만 감정을 다 느꼈을 해준을 생각하며 마음이 참 아렸다. 서래에게 뒷통수를 맞은 것 같고, 본인의 수사원칙이 다 깨진 것 같아 화가 나면서도, 왠지 그녀를 감싸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고, 정말 그랬더라… 그렇게 본인 이미지상으로는 할 것 같지도 않은 행동들을 하며, 그 후로 해준은 시름시름 앓아가게 되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변화가 일어나는 매우 극적인 부분이어서 기억에 남는다.3) 우리 일, 무슨 일이요? ~~~ 붕괴됐어요. /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어요? (*n)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정말 많은 사람들이 손꼽지 않았을까 싶은 부분이다. 사랑은 붕괴라는게 정말 .... 왜 이 비유를 내가 먼저 찾지 못했을까하는 오만한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맞는 말인 것 같다.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면, 나의 신념과 금기들은 방해물이 된다. 그걸 깨는 과정은 매우 고통스럽기에, 그들이 이기는 경우가 나에게는 많았지만, 그 굳건한 자부심을 흔들고 망쳐, 방해물로 여겨지게 할 수 있는 건 정말 사랑밖에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붕괴되었다는 것을 느낀 후에 해준이 내뱉은 말들은 그러니 고백일 수밖에 없고, 그 마음이 제대로 전해졌다면 서래 역시 매우 붕괴되는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해준은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냐고 하고, (정확히 그 워딩을 듣고 싶었던 걸 알지만) 그에 서래가 중국어로 답하는 부분은.... 정말 마음이 아렸다.....4) 바다로 가요. 물로 들어가요. 내려가요. 점점 내려가요. 당신은 해파리예요. 눈도 코도 없어요. 생각도 없어요.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아요. 아무 감정도 없어요. 물을 밀어내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밀어내요, 나한테. 내가 다 가지고 갈게요, 당신한텐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이 구절까지 읽고, 뒷 내용이 더 궁금했지만 잠을 청했다. 이 말이 너무 따뜻해서 그랬는데,, 가끔 감정적으로 힘든 날이면 내 옆에 엄청 거대한 솜뭉치 같은 로봇이 있어서, 내가 언제 어떤 자세로 어떻게 뛰어들던 날 받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나의 여러 푸념과 걱정과 고민들을 밤새 내가 잠에 들 때까지 들어줄 수 있는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 존재가 사람이면 그 사람도 언젠간 지칠 거고, 들으면서 생각 회로를 돌려야 할 테니, 그냥 로봇이었으면 좋겠는 것이다. 근데 저렇게 힘든 날에, 자신이 다 가지고 가겠다면서 그 감정들과 일을 밀어내라고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참... 벅차오르게 좋았다. 해준의 입장에서라기 보다는 그냥 내가 저 말에 큰 위로를 받았다. 이젠 혼자 잠에 들어야하는 나이인데, 누가 날 저렇게 재워준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설정에 대한 놀라움- 계속 남겨진 아내 생각이 났다. 주말 부부인데... 전화 한 번에 달려가는 게 참 씁쓸했고, 누가봐도 서래와 해준의 사이가 떳떳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근데 그러다가도 정신을 차려보면 서래와 해준 둘 생각만 하고 있다.... 내가 사랑한 것도 아닌데 내 마음이 다 찌르르한 것이, 참 이상하고 신기했다.- ‘마침내’ ‘단일한’과 같은 어색한 단어 몇 개로, 둘의 며칠도 안 되는 서사를 완성한 것이 정말 대단했다. 원래 연인들이 사귀면 그들의 첫 만남이나, 잘 맞는 코드나 단어 몇 개로도 꺄르륵 거리면서 잘 대화하는데, 그게 그냥 일반적인 연인이 아니라 언어의 장벽도 있고 상황의 장벽도 있는데 느껴져서, 참 감정은 언어를 초월하는구나 싶었다. 그냥 단순히 한국인 피의자 여성과 한국인 경찰이라면? 그 경찰이 주말부부가 아니었다면? 배경이 이포나 부산이 아니었다면? 안개가 끼지 않았더라면? TV 속 흘러나오는 대사들, 밤마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서래, 수영장에서 살해당한 두 번째 남편... 여러모로 설정과 연출의 힘을 더 크게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