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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고전 미술에 관한 비평글이다. BBC의 강연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던 내용을 에세이로 정리한 존 버거의 글로 매혹적이고 신비롭게, 그리고, 때로는 권위적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고전 미술 작품 세계 속에 숨겨진 화가들의 의도, 의뢰자의 의도와 그 속에 내포된 사회 구조에 관한 메시지 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삶 속에서 경험되는 수 많은 시각적 이미지의 생겨남과 사라짐 가운데 화가들에게, 또 그림을 의뢰한 사람들에게 포착된 것들이 그려져 남는다. 그림을 하나 그려낸다는 것은, 게다가 여전히 남아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유화작품을 하나 그려낸다는 것은 보통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공간 속에 있었던 그 수많은 이미지 중 그려져 남은 것에는 의도가 없을 수는 없다. 존 버거는 글 안에서 고전 유럽 미술의 몇 가지 키워드를 비틀어 보는 관점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3장에서는 고전 미술 작품에서 담아내고 있는 여성들을 대하는 시선, 누드라는 양식 안에서 벗은 몸이 전달하는 관능적인 이미지를 고전 미술의 해석의 틀 안에서 다른 의미로 승화하려는 시도에서 드러나는 위선적인 태도들을 짚어낸다. 그림 속의 대상이 관객에게 다가오는 방식이 양식 안에서 보여주는 일관성을 보여주며, 시선을 의식하며 말을 건네는 이미지와 그것을 감상하는 관객, 그것을 표현하는 화가 사이에서 드러나는 사회 구조상을 비판한다. 5장에서는 유화 전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사실적인 질감 표현과 색감 표현이 가능해 진 이후 유럽에서 미술이 재력가들과 권력가들에 의해 활용되는 방식을 짚어내고 드러낸다. 그림을 소유함으로서 사물의 외형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인물화 안에서 드러나는 인물과 관객 사이의 관계 설정 등은 단순히 그림이 보여주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그림이 갖는 의도와 의미에 대한 확장적인 시각을 갖도록 도와준다. 미디어가 발달한 현대에서 이미지에서 벗어나 살 수는 없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다른 이들로부터 만들어진 이미지에서 벗어나 살 수 없다. 7장에서도 다루고 있는 광고, 공공 예술과 산업적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아침에 눈을 떠서 잠에 들 때까지 늘 이미지를 접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독서로 일깨워 진 것은 내가 이미지가 주는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누리는 것만큼이나 이미지가 품고 있는 의도, 이미지로 안에서 표상되는 사회의 구성원들의 관계에 미치는 힘, 그리고, 생각에 미치는 힘에 대해서 의식하고 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메시지와 그렇게 하기 위한 몇가지 도구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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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맛에는 이유가 있다 : 인문학에 과학으로 감칠맛을 더한 가장 지적인 파인다이닝
정소영
오프라인에서건 온라인에서건, 한국인은 “먹는 것에 진심인 민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정말 그런가는 둘째치고서라도, 이 주장의 재미있는 점은, 저렇게 주장하지 않는 국가나 민족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이 단순한 어구는 그래서 먹고 마시는 행위의 상반된, 하지만 불가분인 두 측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섭취는 생물로서 인간이 충족해야 하는 조건임과 동시에,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과 결부된 문화적 행동이라는 점이다. 하여, 이 책의 다소 난잡해 보였던 구성-두 저자가 한 주제에 대해 번갈아가며 서술하는-은 그렇게 먹고 마시는 행위의 본질 어딘가를 건드린다. 이러한 접근이 특히 유효하게 느껴졌던 챕터가 바로 “파스타”에 대한 부분이었는데, 이탈리아인들의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결부된 몇 가지의 파스타를 파고들어가는 행위를 다룬 섹션이 탄수화물과 인간 삶의 본질적 불가분성을 논하는 섹션과 맞닿아 있는 것은 우리는 살기 위해 먹으나 그 삶은 곧 먹음으로 정의된다는 재미있는 순환을 정말 잘 드러낸 챕터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장점만 있는 책은 아니다. 여러 개의 분절된 소주제로 쪼개진 주제의식은 거기서 다시 한번 음식의 사회적 측면과 자연적 측면을 한번 더 분리하는 과정에서 모호해지고, 제한된 분량에서 파고들 수 있는 깊이는 한정되기에 굳이 시니컬하게 평하자면 얇은 잡학서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평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세상 모든 음식이 미슐랭 파인다이닝일 필요가 없는 것 처럼, 모든 책이 다 "존재와 무"일 필요도 없다. 이 책은 괜찮은 기획에 저자들의 지적 성실함이 더해져, 먹는다는 행위를 분석적으로 파고들고자 하는 이들에게 좋은 입문서가 되어주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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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맛에는 이유가 있다 : 인문학에 과학으로 감칠맛을 더한 가장 지적인 파인다이닝
정소영
맛의 세계가 조명을 받고 있다. 최근 Netflix의 ‘흑백요리사’가 인기를 끌었다. 뉴스는 불경기를 말하지만 맛집이라 불리우는 식당을 앞에는 식사시간이면 긴 줄이 늘어서 있고, 미식의 세계를 이야기 하고 파인 다이닝을 이야기하고 찾아가는 발걸음은 늘어나고 있다. 음식을 나누는 것,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은 어느 때에나 놓치고 싶지 않은 일이고 쉬이 싫어 할만한 주제가 못 된다. 여전히 ‘예술 독서’가 무엇인지 잘라 말하기 힘들지만, (그리고 그 애매한 바운더리가 너무 재미있다) ‘예술독서모임’에서 이번에는 모두가 관심을 갖는 맛과 음식에 관한 책을 찾아 읽기로 했다. 땅에서 온 돌과 산에서 온 색색깔의 자연에서 온 풀 빛깔로 만든 파레트로부터 삼라만상 시각세계를 창조하는 화가들이 예술가라면, 온갖 재료들로 오감의 조화를 창조해내는 맛의 세계도 기꺼이 ‘예술’이고도 남지 않겠는가? <<모든 맛에는 이유가 있다>> 는 인문학자와 의사의 콜라보레이션이다. 맛은 지극히 인문학적이고 문화적이면서 동시에 모든 감각세계가 그러하듯 몸의 구조와 작용에 기저를 둔다는 것, 그것이 상호작용하는 것을 보는 과정이 흥미로운 지점이 될 것이라는 것을 책을 읽기 전부터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저자들은 몇 가지 잘 알려져있고 음식 문화에서 중요한 음식과 식재료 몇 가지의 이름을 큰 제목으로 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샐러드 → 스프 → 생선 → 파스타 → 고기 → 와인 → 디저트, 서양식 코스요리의 순서와 같기도 하다. 소화가 잘 될 것 같은 샐러드와 스프의 든든하게 배를 채워주는 생선, 파스타, 고기, 화려하게 후각을 자극하는 와인과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디저트에 이르기까지. 이 책을 관통하는 거대한 주제는 “맛있게 느끼는 과정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이다. “음식을 더 맛있게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로도 볼 수 있겠다. 책은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경험이 단순히 식재료의 맛과 향의 조합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그밖의 요소들, 감각적으로는 온도, 시각적인 아름다움, 문화적 맥락, 분위기, 음식에 관한 정보 등이 어우러져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일어나는 현상이고, 우리 몸의 미각수용체에서부터 문화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과 층위에서 관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장이 반찬이다', ‘음식은 눈으로도 먹는다’ 같은 음식에 관한 관용구만을 떠올려봐도 이미 이러한 ‘맛있는 경험’을 위한 몇가지 지침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책에서는 조금 더 흥미롭고 세부적인 사례들을 다루고 있는데, 칸딘스키의 추상을 닮은 샐러드가 사람들에게 더 맛있는 경험을 선사했고, 비싸다고 알려진 와인은 조금 더 긍정적인 묘사를 이끌어 낸다는 실험 결과도 그 맥락 안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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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 환원주의의 매혹과 두 문화의 만남
Kandel, Eric R
에릭 캔델은 뇌과학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익숙한 이름일 수도 있는데, 이름의 주인은 신경과학 교과서 (바이오및뇌공학과 학부과정에서 이 교과목을 사용한 과목을 배운 적이 있다)인 ‘신경과학의 원리’를 집필한 뇌과학자이다. 그것도 2000년도에 기억의 신경생리학적 메커니즘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생리학상을 수상한 이름난 과학자이다. 저자가 책 곳곳에 숨겨놓은 유머가 교과서에 등장하는 유머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이 그저 착각은 아닌 듯 하다. 교과서로만 저자를 접했던 독자인 내게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에서 서양미술사조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시각 처리의 신경생리학을 능숙하게 엮어내는 뇌과학자 에릭 캔델의 면모는 놀라웠다. 객관적 증거를 모으고, 사건에 붙은 군더더기는 발라내어 정교하게 정제된 추상… 사물의 작동원리를 찾아내는 과학자들의 시선, 그리고 인간의 영혼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고 감정을 뒤흔들며 새로운 인식의 차원으로 이끄는 예술가의 작업은 완전히 다른 일로 느껴지지만, 에릭 캔델은 그 두 작업이 사실 그리 멀지 않는다고 말한다. 뇌과학의 방법으로 우리 인식의 물리적 기저를 이해할 수 있다면 종종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인문학과 과학의 어색한 사이를 서로 화해시켜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시대를 거듭해 예술가들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방법을 발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빛과 형태를 다루는 화가도, 소리를 다루는 음악가도, 단어와 문장을 다루는 작가도 그래왔다. 아무나 해낼 수는 없는 일, 그래서 때로는 신비롭게 여겨지기도 하던 예술가들의 영역에 현대의 인지과학자들이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현대의 유물론자들, 인지신경과학자들(유물론자가 아닌 인지신경과학자도 물론 있을 수는 있겠다지만…….)은 마음의 요동은 신경세포의 활동과 분자의 작용에서 우리 인식세계로 가는 아주 복잡한 그러나 언젠가는 알아내게 될 함수이고, 예술가들의 전략은 사람 뇌의 해부학적 생김새와 생리학적 작동원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물질과 사건의 구성요소를 샅샅이 분해하여 물질 세계의 기초인 원자와 (때로는 양자) 물리법칙으로 분석하는 환원주의 방법이 이제 사람의 인식 능력, 감정의 작동원리를 다루는 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 ‘환원주의’라는 키워드는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일어나고 있는 과학자들의 예술침범사태라는 맥락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인지 기능을 물리적, 생리학적 기본 단위로 환원하는 작업은 fMRI 등 다양한 신경 이미징 기술의 부상 이후에나 가능했지만, 선, 색, 면, 구도, 대비적 요소 등 다양한 시각 요소의 기본단위와 예술적 감흥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20세기 초부터 이어져 온 미술사적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20세기 카메라의 발명과 함께 부상한 서구의 추상주의 예술은 구체적인 사물의 형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기를 거부하고, 사건과 사물이 주는 인상을 다양한 시각 요소의 조합으로 포착해 내며, 사물의 구체적 형상에서 해방되어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시각 자극의 본질을 찾고자 했다. 물질이 구성하고 있는 형상, 인간, 산과 바다, 건물, 하늘과 땅, 견고하게 여겨졌을 사물들이 해체되어 원자의 부스러기로 이해되는 시대에 관념 세계의 형상 또한 분해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병행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언젠가 과학자들이 알아낸 시각 인지의 비밀이 예술 창작에도 적극적으로 적용되는 날이 올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실험적으로 알게 된 인간의 시각적 인지모델로부터 예술적 감흥을 최고로 끌어내기 위해 계산된 작품. 정교하게 정제된 과학적 추상에서 엄격한 논리를 따라 유도되는 예술이다. 평생을 걸쳐 악기와 붓을 제 몸처럼 익혀 예술 세계와 하나되는 (적어도 나의 인상 속에서 그렇게 그려지는) 예술가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인상이다. 그러나, 예술 창작 활동을 하면서 추구하는 감각과 영감을 세계를 사람들이 포기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도 든다. 붓으로 악기로, 때로는 글로써 자기 표현을 쏟아내고자 하는 열망은 단순히 작품이 주는 감흥을 무슨 수로든 극대화하고자 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욕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인지기능의 물질적 기저를 파악하는 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몰랐던 것을 알려주게 될 것이고, 예술가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자기표현을 위해서 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말하자면, 이제 화가의 파레트가 넓어지는 셈이다. 물감과 캔버스, 붓과 종이를 지나 신경과학의 원리도 예술가의 파레트로 들어가는 날이 머지 않은 듯 하다. 예술가의 시선으로도 과학자의 시선으로도 작품 비평이 가능한 예술의 새 시대, 그것이 에릭 캔델이 말하는 인문학과 과학의 화해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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