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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페터 한트케 지음, 윤시향 옮김
근원을 감각하는 모험 탁스함의 약사는 별안간 스텝 지역으로 떠난다. 그리고 이 모험은 다시 탁스함으로 돌아오며 끝이 난다.서술자가 언급하듯, 이 이야기는 ‘상업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한 개인의 가장 심원한 근원에 가닿는 신화이기도 하다.그 신화를 창조하는 것, 그것은 비단 약사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욕망이며 또한 의무일 것이다.모험을 통해 일깨워진 감각을 이야기하는 장면을 통해 방랑을 거쳐 귀환한 그 자리에서 개인은 본질적으로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대해 엿볼 수 있다. “나는 그 경악을 통해 현재와 하루가 그렇게 새로워지는 시간에,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좋았답니다. 말하자면, 언제부턴가, 길을 가며 마주친 무언가로 나 자신이 특별히 충만해 있을 때, 나도 모르게 조용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중략) 그리고 그런 순간을 내가 전혀 엉뚱한 곳에 정신을 팔고 속을 끓였던 순간, 혹은 나 자신이나 세상에 불만을 품고 원망하거나, 아니면 최악의 경우 속으로도 벙어리가 되어버렸던 순간들과 비교해보면서 내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의식할 수 있었어요. (중략) 안과 밖이 서로 파고들어 완전히 일체가 되었어요. 이야기하기와 스텝 지역이 하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스텝 지역은 그러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죠. 그런 식의 이야기하기는 모든 것을 새롭게 발견하게 했고, 변화를 만들어냈으며, 눈을 들어 우러러보도록 했어요. 물론 새의 눈으로, 독수리의 눈으로 본다는 의미에서의 우러러보기죠!” 그러나 고양된 정신은 비로소 이야기하기를 통해서만 완수된다 (Innerhalten). 아래는 승리자의 말이다. "당신은 그 실어상태를 떨쳐버려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당신의 무언이 오늘이라도 당장 당신을 죽일 거예요. 당신의 침묵은 결코 침묵이 아니에요. 비록 처음 얼마간은 당신의 의식을 확대시켜주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오랫동안 혼자 있을수록 당신의 실어상태는 위험해지고, 급기야 생명까지 위협할 거예요. 실어상태가 계속되면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그토록 의미있어 보이는 현재가 실현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모든 체험까지 거꾸로 거슬러올라가며 파괴될 거예요. 그렇게나 상징적인-어린 시절까지도. 그러면 당신의 기억은 무가치해지고 또 파괴되어버리죠. 기억이 없어지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찾을 것이 없어지고, 당신 자취도 안 남아요. 당신은 지금 세계의 한계에 다다른 거예요, 친구여. 게다가 세계의 한계 저편으로 밀려날 위기에 처해 있어요. 그러니 당신은 새롭게 말하려는 시도를 해야 해요. 새로운 단어를 찾아내고, 문장을 새로 만들고, 큰 소리로, 아니 소리라도 내보세요. 당신의 말이 비록 얼토당토않고 터무니없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당신이 다시 입을 연다는 사실이에요. (생략) 신화가 된 이야기는 노랫말로 전승된다. 약사의 사랑은 아름다운 시가 되었다.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탈진상태가 되어 서로의 품에 몸을 던져 안겼다.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서로에게서 맛보았다.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나른함 속에 나란히 누웠다.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경탄 속에 깨어났다.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조바심으로 창마다 내다보았다.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인내심으로 계속 달렸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로 사랑했다.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로에게서 자유로웠다.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로에게 대담했다.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로에게 감사했다.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로를 인정했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땀을 흘렸다,소리를 질렀다,울었다,피를 흘렸다,침묵을 지키고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헤어졌다.그들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갔다.말할 수 없음에 대하여말할 수 없이 분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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