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하라리, 유발
이 책을 읽는 모두가 '사피엔스'임을 고려하였을 때, 고작 책 한 권으로 이 사피엔스를 시작부터 끝까지 고찰하고자 하는 시도는 대담하면서도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책의 제목은 어쩌면 과대광고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 책은 별로 특별한 것이 없어보였던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지금과 같은 호모 사피엔스가 되었는가를 설득력과 흡입력을 지닌 채 탐구했다. 우선, 이미 널리 알려진 농업혁명, 과학혁명과 동일한 비중으로 인지혁명을 다룬 것이 해당 용어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해 본 나에게는 인상적이었다. 내가 관련 학계의 동향을 파악할 여력이 되지 않아 인지혁명이 저자 유발 하라리가 최초로 제창한 주장인지도, 그리고 학계에서 인정받는 가설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이 책이 인지혁명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라고 느낀다. 이 책은 순서대로 인지혁명, 농업혁명, 인류의 통합, 그리고 과학혁명을 다루는데, 가장 먼저 언급된 인지혁명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짓는 기준으로 다양한 기준을 제시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특이한 사례를 통해 반박된다. 예를 들어,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에는 까마귀도 도구를 사용해 먹이를 먹는다는 이야기가, 인간만이 언어로 소통한다는 주장에는 돌고래도 나름의 언어가 있다는 이야기가 뒤따른다. 하지만 오로지 인간만이 상상속의 허구, 즉 imagined reality를 실체처럼 믿는다는 주장에는 쉽게 반례를 찾기 어려워 보인다. 또한 인지혁명의 선행 없이는 그 다음의 혁명도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절실히 느낀다. 그래서 인지혁명을 다룬 부분이 이 책이 높은 가치를 지니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책은 그저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 짓기 위해 탄생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을 분명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뿌리로 삼아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나,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던진다. 먼저 앞서 인지혁명 챕터를 다루면서 신용의 중요성을 다시 실감했다. 외형상 동일한 플라스틱 카드일지라도 신용카드의 가치는 저마다 크게 다르지 아니한가. 우리는 사회 구성원 다수의 약속이 그 어떤 실물보다 높은 가치를 가지는 시대, 쉽게 말해 실체보다 신용이 훨씬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나 또한 주변 사람들과 돈독한 신뢰 관계를 유지하는 데 애써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러한 예시는 하나가 아니다. 이 책에서 농업혁명을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고 언급한 것은 인지혁명의 가치를 조명한 것 만큼이나 독창적인 부분이다. 정말로 농업혁명을 사기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일단 의견을 유보하고자 한다. 하지만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자 만들었던 농사가 오히려 삶의 질을 악화시켰던 선례가 오늘날에도 반복된다는 주장은 반짝이는 대목이었다. 예를 들어, 이메일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전세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지만 오히려 홍수처럼 밀려오는 이메일에 시달려 업무량이 훨씬 늘어나 사람들이 더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즉, 편리를 안겨 줄 것이라고 믿었던 신문물이 실제로는 불편을 안겨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술이 항상 인간을 편리하게 만들지는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충분한 역사적 사실과 적절한 비유와 유머를 통해 설득력과 흥미를 모두 추구하며 저자의 주장을 전달했다. 이 책에서 느낀 영감은 긴 시간이 흘러도 오랜 지혜로 남을 듯 하다.
사피엔스
하라리, 유발
사람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행동 양상을 보이는 동물은 아마 현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인류의 역사는 매우 방대한 양의 정보를 담고 있고 충분히 흥미롭다. 그렇다고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호기심이나 흥미 영역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수많은 인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대만큼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큰 가치를 지닌 때가 있었을까? 초등학교, 중학교 때 암기하듯이 배우듯이 역사를 단순히 사실의 나열로만 바라 보는 것은 그 잠재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면서 기를 수 있는 것은 인간 문화의 다양성을 접하면서 얻을 수 있는 사고 방식의 유연성과 복잡한 사건의 흐름을 이해하는 능력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공통된 특징들을 찾아보고 무엇이 인류를 크게 변화시키는지를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피엔스는 그러한 인류의 역사에서 큰 변화를 일으킨 3가지 전환점들, 인지 혁명, 농업 혁명, 과학 혁명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미래 인류의 가능성에 대한 풍부한 상상을 말하면서 책을 마친다. 그러한 인간의 특징들을 뽑아내는 통찰력, 혹은 하나의 가설과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유발 하라리의 능력은 본받을만하다. 하지만 그 논리 전개의 중간 중간에는 논리비약적인 요소들이 많고 우리의 관점에서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하면서도 많은 현대 인류가 지닌 특징들에 따라 본인의 경험적 주관이 섞여 있는 주장을 하기에 주의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다. 때로는 인권이 허구의 개념이라거나 신과 악을 동시에 믿는 인지부조화가 인간의 강점이라는 등의 대담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런 수많은 주장들 중에 특히 생각할 거리가 많았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류의 행복에 관한 논쟁이었다. 많은 이들이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고 하면서도 삶의 행복을 희생하는 결정을 쉽게 내리곤 한다. 때로는 본인이 언제 행복한지 잘 모르는 사람도 있다. 우리들은 행복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기면서도 정작 행복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 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행복이라는 개념 자체가 통일될 수 없고, 사람마다 다른 행복 체계와 개념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마치 ‘인식되더라도 언어로 전달되거나 해석될 수 없다‘는 고대 그리스의 허무주의자 고르기아스의 주장을 떠올리게도 한다. 우리는 우리 각자가 행복한지 아닌지에 대해서 느낄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상태를 타인에게 제대로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행복에 관한 논쟁이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개개인이 느끼는 행복을 바탕으로 그들의 행동을 그들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줄 것이고, 행복이라는 개념이 갖는 보편적인 특징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 특징 중 하나를 찾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행복의 개념에 대해서, 책에서는 세 가지 관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 세 가지 관점은 각각 생화학적 관점, 삶의 의미에 관한 관점, 불교적 관점이다. 생화학적 관점은 행복이라는 것은 인체 내부에서 세로토닌, 도파민, 코르티솔 등의 호르몬 또는 신경전달물질이 뇌에 작용하는 결과로 보는 것이고, 삶의 의미에 관한 관점은 어떤 일이든지 그 일에 어느 정도의 가치를 두는지가 행복의 중요 요소라는 관점이며, 불교적인 관점은 특정 감정을 좇는 상태 자체가 행복을 방해하며, 감정의 요동으로부터 벗어난 상태가 행복이라는 관점이다. 각각의 관점은 저마다의 설득력이 있다. 이 3가지 관점 중 생화학적 관점과 삶의 의미에 대한 관점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생화학적인 관점과 삶의 의미에 대한 관점을 보면, 특정 자극 혹은 사건에 대한 생화학적 반응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극과 사건에 대한 기억과 학습이 이루어지게 하고 더 나아가 어떠한 관점과 편견을 형성하는지에 대해서도 영향을 준다. 삶의 의미 및 가치 체계에 대한 변화도 특정 자극에 대한 생화학적인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 가령, 플라시보 효과 혹은 노시보 효과 등이 대표적인 예시일 것이다. (참고 자료 : The biochemistry of belief (nih.gov)) 실제로 알고 있는 사실이 해로운 것 혹은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라고 믿게 될 때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에는 큰 차이가 있다. 불교적인 관점은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이라기보다는 행복한 상태에 놓이기 위한 방법을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행복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그 기준을 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구체적인 기준이 없는 개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행복과 관련된 개념으로 감정과 기분이라는 요소가 있다. 그리고 좀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정서라는 개념이 있다. 행복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3가지 개념 정서, 감정, 기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일 것이다. 그러면 이 3가지가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알아보자. 정서란 사람들이 체험하는 넓은 범위의 느낌ㅇ르 총칭하는 용어로 감정과 기분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감정은 사람이나 사물을 향한 강렬한 느낌을 뜻하며, 기분은 감정보다는 덜 강렬한 느낌이다. 감정과 기분 사이의 정확한 경계선은 여전히 모호한 편이지만, 감정은 대체로 지속 시간이 짧은 편이며 ’무엇에 대한 감정‘ 등 목표 대상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에 반해 기분은 감정보다 오래 지속되는 편이고 일반적으로 목표 대상이 주어져 있지 않은 자신의 느낌이다. 하지만 정서, 감정, 기분이 이론상으로는 분리되지만 실제로는 명확하게 구별하기 어렵다. 특히, 감정과 기분은 서로의 변화가 서로에게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감정에는 적어도 6가지의 보편적 감정(분노, 공포, 슬픔, 행복, 혐오, 놀람)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정서는 문화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긍정적, 부정적/활동적, 비활동적/ 불쾌함, 유쾌함의 특성으로 분류될 수 있다. 기분의 구조 책에서도 설명하듯이 기존의 역사 연구는 당시 사람들의 감정이나 행복 수준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유로 역사라는 분야 자체가 행복을 논할 수 있는 증거 자료들이 없어서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 및 감정에 대한 무관심은 비단 역사 연구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론 경제학, 정치학 등 많은 분야에서도 인간의 행복에 대한 연구는 종종 등한시되고는 한다. 그러한 이유들 중 하나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자면, 합리성에 대한 미신이 있다. 보다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감정이 배제되어야 한다는 믿음이고, 현실 상황을 이론적으로 모델링할 때에도 감정은 배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물론이고 연구자들도 인간과 감정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함에 있어서 감정을 배제한 접근에는 큰 한계가 있다. 그러다가 2002년에 다소 특이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나왔다. 수상자 중 한 명인 대니엘 카너먼은 심리학과 출신으로, 행동경제학이라는 분야에 큰 공헌을 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행동경제학은 심리학을 경제학에 적용한 학문이며, 그 이전의 고전 경제학이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 얼마나 등한시했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경제학이 고전 경제학과 다르면서도 비슷한 점은 사람들이 적당히 합리적이며, 감정적이기도 하고 통계적 사실에 위배되는 편향을 가지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마치 감정적이라는 부분을 여전히 인간의 합리성을 방해하는 요소처럼 여겨진다. 실제로 우리도 때때로 감정을 비이성적인 것으로 여기고는 한다. 감정적인 사람이라는 평가에는 종종 논리를 덜 중시한다는 평가가 함축되곤 한다. 하지만 정말로 감정은 쓸모없는 것이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유도하는 것일까? 여기에 흥미로운 사례 하나를 살펴 보자. 1848년에 버몬트 주 철도회사 직원인 피니어스 게이지는 현장에서 폭약을 다루다가 철근이 얼굴로 날아들어 두개골을 관통했다. 다행히 그는 살아남았고 더 놀라운 것은, 읽고 말하기, 인지 능력테스트에서 일반인 이상의 점수를 받았다는 것이다. 대신에 그는 전두엽 피질에 손상을 입어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됐다. 이로 인해 그는 슬퍼해야 할 상황이나 기뻐해야 할 상황에서도 적절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며, 타인에게 무례하게 행동하게 됐고, 결국 회사에서 해고됐다. 이 피니어스 게이지의 이야기를 여러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것을 감정에 대한 이해는 사람들 간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비슷한 맥락으로 다음의 글(행동경제학 - 사람에게 감정이 없다면?)에서는 감정에 대한 이해 능력을 잃은 사람은 더 비경제적인 행동을 보인 사람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즉, 감정이 배제된다고 사람이 더 합리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감정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본인과 상대방이 각자 행복을 추구함에 있어서 보다 나은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아질수도 있을 것이다. 행복과 사회적 관계와 관련하여, 다음의 영상을 참고할 수 있다. ( 참고 영상 : 행복에 대한 최장 연구가 알려주는 좋은 삶에 대한 교훈 https://www.ted.com/talks/robert_waldinger_what_makes_a_good_life_lessons_from_the_longest_study_on_happiness?language=ko#t-109471)이 영상에서는 매우 좋은 환경의 사람들과 매우 빈곤한 환경의 사람들의 두 극단적인 집단에 대해서 장기간 그들의 행복을 추적, 조사한 연구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연구자가 내린 결론은 행복한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과 얼마나 긍정적인 관계를 쌓았냐는 것이다. 어쩌면 다른 사람과 긍정적인 관계를 쌓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자연 선택의 영향으로 살아남아 현대에 남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기에 상대방의 감정 변화를 민감하게 파악하여 의사 결정에 반영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구축하는 것에 행복을 느꼈기에 보다 원활한 사회 협력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언급했던 인지 혁명 이전에 그만큼 중요한 혁명으로 감정 혁명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유인원들도 감정을 갖고 있고, 비록 현재의 우리로서는 다른 동물들이 얼마나 많은 감정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은 이들보다 더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면 떠오르는 저자의 주장이 있다. 저자는 농업 혁명을 개인에 대한 사기극으로 봤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대로 농업 혁명의 사람들은 정말로 더 불행했을까? 농업 혁명의 결과로 사람들은 정착을 하고 서로 모여서 마을을 이루면서 인구가 급증했다. 비록 농경 사회의 구성원들 개개인은 수렵채집인들보다 영양적으로 빈곤하고 더 많은 노동을 했지만, 농경 사회의 구성원들은 정착한 곳에서 보다 많은 마을 사람들과 상호 교류를 통해 긍정적인 관계를 구축했을 것이다. 애초에 주변 사람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구축하지 못 했으면 마을이 형성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농경 사회의 구성원들은 농사를 망치는 것에 대한 걱정, 농사를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중압감 등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농사 자체가 노력을 들이면 식량이 생산된다는 보장성 덕분에 구성원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도 느꼈을 것이고, 이러한 희망은 설령 그들이 힘들지언정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작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많은 카이스트 학생들도 학업 생활을 힘들어 하지만, 꼭 불행을 느끼면서 사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 중 일부는 공부를 통해서 더 나은 삶 또는 스스로의 발전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풍요에는 2가지가 있다.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풍요. 물질적 풍요가 뒷받침되지 않는 정신적 풍요는 성립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수준이 어느 정도 보장이 된다면 정신적 풍요를 더 선호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현대 사회, 특히 대한민국은 40년 전보다 높은 수준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됐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당시의 대한민국 사람들보다 더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제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 외에 정신적 풍요의 중요성을 자각했으며, 이러한 정신적 풍요를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필수일 것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발전에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이것을 인간의 강점으로 여기고 활용하려는 자세가 중요할 것이다.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 여성과 과학 탐구
임소연
여성과 과학 사이의 거리는 이대로 괜찮은가요 저자는 옴니버스식으로 사례에 기반한 얘기들을 전하며 각 얘기는 크게 여성 소외 상황과 해당 맥락에서 여성의 참여가 중요한 이유로 나뉜다. 이를 통해 과학에서 여성의 참여가, 과학이 과학 그 자체의 발전 및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더 나은 발전 방향을 찾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책은 크게 여성과 과학기술 발전, 여성과 과학과 사회의 관계, 과학계 성차별의 현주소로 나뉜다. 그 첫 사례로서 성염색체를 소개한다. Y염색체 종말 가설을 통해 Y염색체가 남성의 상징임을 비판한다. X염색체는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며 남성의 성기능에서도 X염색체의 역할은 중요하기에 Y염색체와 남성성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고정관념에 의해 과거 학자들은 Y염색체에 대한 잘못된 방법론을 적용해 잘못된 지식을 생산했다. 또한, 남녀 뇌 차이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 방식을 비판하며 모자이크 뇌 이론을 소개하고 남녀 뇌 차이에 대한 연구 방법으로서 페미니스트들이 결성한 뉴로젠더링의 소개, 우울증과 폭식증을 통해 장의 성차 연구의 필요성, 더 나아가 물질과 감정의 통합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여성의 경험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임신의 얘기로 넘어가 임신의 신비를 적극적으로 해소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는 태아 중심의 연구였으며 태반은 그 중요성이 간과됐다. 이 연구 방향을 바꾸고 여성의 건강을 위해 태반 연구가 필요하며 이는 지식 생산자로서 여성의 참여가 절실하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의 의미는 바로 여자라는 대상을 과학적 무지의 상태로 두지 않는 것이다. 결국 과학계에서 여성이 소외되면 과학이 어떻게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는지, 그리고 여성의 참여가 과학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여성과 과학, 그리고 사회에 대한 논의이다. 후성유전학을 통해 아이의 건강과 임산부 간의 관계에 대해, 오로지 임산부의 책임이라는 기존 관념을 비판한다. 오히려 임산부가 아이의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면 오히려 사회의 불평등이 더더욱 해소돼야 할 근거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책임이 있다는 것도 역설해 임산부의 행동과 이를 둘러싼 윤리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를 촉구한다. 그리고 난자 냉동 기술이 기술을 통한 여성의 해방이지만 여성에게 불리한 사회적 구조를 가린다며 비판하며 보조생식기술에서 남성 참여의 필요성을 얘기한다. 그리고 인공지능과 로봇의 얘기에서는 이루다 등을 통해 사회적 파급력이 큰 인공지능과 로봇이 어떻게 성차별적으로 되거나 성고정관념을 강화하는지, 그렇기에 인간과 닮지 않은 인공지능 및 로봇 생산과 여성의 참여, 사이보그 선언문을 토대로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여성들의 삶을 옹호한다. 마지막으로 진화론과 물리학에서 기존 페미니즘이 활약할 가능성을 제시하는 한편, 물리학 등 여러 과학 분야에서 능력주의의 위배 등 성비 불균형의 현주소를 논의한다. 저자가 제시한 논증에서는 논리가 약한 부분이 여럿 있다. 가령, Y염색체를 남성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에 대한 비판이 그렇다. BRIC (ibric.org)에 따르면 Y염색체 소멸론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한 Y염색체 보유자와 sex로서의 남성 집단은 상당히 일치한다. 또한 상징이 대상의 모든 정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X염색체도 남성의 성기능에 관여한다는 것은 근거로 불충분하며 Y염색체를 남성의 상징으로 보는 것에 대한 저자의 반박 논리는 충분치 않다. 그러나 여성의 소외로 인한 과학 발전의 악영향과 여성의 과학 참여가 이 문제를 완화시킬 것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그 이유는 크게 확증편향과 문제의 파악 범위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는 주장은 잘 반박하지 않는다. 이는 그 신념이 성 고정관념인 경우에도 적용되며, 생물학계에서도 예외가 아님을 이 책에서 밝혔다. 즉, 과학계 주류가 과학적으로 잘 검증되지 않은 특정 신념을 가지면, 누군가에게 불리하게 과학이 생산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여성의 문제는 여성이 더 잘 파악하고 공감한다. 많은 이들이 자기 주변의 주제에 더 관심을 가지는데, 남성 위주의 과학자 집단은 남성 문제 쪽으로의 연구 역량 편향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인구 절반에 해당하는 여성보다, 남성의 욕구와 문제가 더 잘 해결되는 사회 구조는 개선돼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더 나아가 과학자 집단은 다양한 베이스를 가진 사람들로 구성돼야 한다는 주장까지 확장할 수 있다. 다만, 생물학계, 공학의 예시에 치중된 것은 이 책의 한계점이다. 저자는 물리학의 남성 편향성에 대한 증거 및 여성의 참여로 물리학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증거를 그다지 제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물리학과에 진학하는 여성 수가 적다는 것은 깊이 생각해볼 문제이다. 여성보다 물리학을 못하는 남성이 물리학과에 진학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여성을 이레귤러로 보고 더 엄격한 사회적 잣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과학에서 여성이 적은 이유는, 지금까지 생산된 물리학, 혹은 과학 및 기술이 남성이 학습하고 성취하기 유리한 방향으로 생산, 교육, 평가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여성이 배우기 더 친근한 과학, 공학이 되기 위해 개인, 과학계, 교육계, 사회 전반이 각각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타인의 고통
손택, 수전
생각 있게 사진을 소비하자.미국의 문화평론가인 수전 손택의 책 <타인의 고통>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단지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연민을 느끼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 무언가는 그 고통의 피해자의 사회적 상황과 가해자 혹은 가해 집단의 동기 및 수단, 시대적 상황 맥락에 대한 이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색, 전쟁 반대 서명에 참여 등이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크게 다음의 3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사진에 대한 전쟁에서의 활용 역사와 특성’, ‘전쟁 사진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력과 그 한계’,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우리의 태도’이다. 이 책은 울프의 <3기니>를 언급하면서 ‘우리’라는 표현을 무분별하게 쓰고 있지는 않은지 화두를 던지며 시작한다. 인류 사회가 전쟁을 예방하는 데에 실패한 것은 상상력의 실패, 공감의 실패이며 이런 현실을 마음 깊숙이 담는 데 실패해 왔다고 말이다. 이렇듯 사람마다 느끼고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면서, 고통의 전달 수단으로서 사진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가령,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교전 시 폭격을 당한 어느 마을에서 죽은 아이의 모습을 담은 동일한 사진이 양국의 선전에 사용됐다는 사실 등을 언급하면서 사진은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며 대중의 반전 감정 강화, 전쟁 동기 강화, 전쟁 참여자의 영웅화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듯 같은 사진이라도 여러 용도로 활용가능한 것은 사진의 특성에 기인한다. 우선, 사진은 객관성과 특정 시점의 전제라는 모순돼 보이는 2가지 특징을 가진다. 전시회 “사진의 민주주의”에서의 아마추어의 사진도 전문가의 사진만큼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 <토지 분배를 위한 모임>에서 관찰자의 기억이 사진의 맥락을 완전히 바꾼 것 등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사진의 의미는 그 사진이 얼마나 관찰자의 공명을 일으키는지에 달려 있다고 봤다. 즉, 사진의 해석에는 관찰자의 주관, 개인적 경험이 개입될 수밖에 없으며, 사진 작가의 의도만으로는 사진의 의미가 온전히 결정되지 않음을 역설한다. 더불어 <시청 앞에서의 입맞춤>, <이오 섬에서의 국기 게양> 등 역사적으로 영향력 있었던 여러 사진들의 조작 혹은 연출이 밝혀졌지만 역사의 증거물이라면서 사진의 객관적 가치에 대한 대중의 생각 혹은 절대성을 부정한다. 다만, 오늘날 전쟁 이미지가 TV로도 전해지기에 보도 사진을 극적으로 날조할 필요성이 없어졌다면서, 보도 사진이 이제 날조의 역사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한다. 전쟁 사진은 연출되지 않았더라도 현실 한 순간의 전달 그 이상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사진은 그 순간을 잊히지 않게 한다. 그중에서도 죽음, 신체 손상과 관련한 사진은 강한 불쾌감을 주며, 시체는 그 주변인에게 더 큰 정신적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 그렇기에 사회에서는 사진의 잔인함 수준을 낮춰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고, 사진작가들은 피사체가 그들에게 더 친숙할수록 신중했다. 그리고 전쟁 사진이 전쟁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면서, 전쟁 사진을 선전용으로 쓰기 어려워졌고, 정부에서는 적과의 전쟁 중 대중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숨겨야 하는지가 논쟁거리가 됐고, 이미지를 검열하고 주검의 얼굴을 가려주는 등 죽은 자에 대한 예의 측면에서 대중의 인식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영향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았다. 죽음, 신체적 손상은 아시아인, 흑인 등 당시 국제 사회에서 소수자들에게서 더 구체적으로 재현됐다. 인디언, 탈레반 병사의 사진 등의 사례를 통해, 낯선 타자의 고통과 죽음은 경의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구경의 대상으로 여겨졌기에 인종차별적이었고 도덕적으로 잘못된 점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이렇듯 사진은 피사체를 대상화하고 구경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살가도의 <이주: 이행 중의 인류>를 예술성, 상업성 측면에서 비판한 대중의 관점과는 달리, 그의 사진이 피사체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 그들을 곤경, 인종의 상징으로 여기게 하고 결국 한 사진 속 피사체들의 개인차, 그 고난의 이유를 한데 동일한 것처럼 여기게 한다. 이런 식으로 고통의 원인을 추상화하고, 전 세계적인 것으로 다루거나 과장하게 되면, 관찰자들이 더 깊은 연민을 느낄지언정, 관찰자 스스로 그 곤경을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느끼게 한다. 또한, 극적인 사진이 주는 충격은 지속적이기 힘들다. 가령, 저자는 담뱃갑의 혐오스런 사진을 넣는다고 그 충격의 지속 기간에 의문을 표한다. 반응과는 무관하게, 사람들은 반복되는 공포에 익숙해질 수 있다. 그렇기에 극적인 이미지의 사용은 사람들을 점점 무감각하게 만들고 그 효과도 떨어뜨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정신에 깊이 각인되지 못했거나 남아 있는 이미지가 적은 잔악 행위들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처럼 같은 이미지라도 특정 관찰자의 반응을 반복적으로 이끌어내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야기가 결합된 경우라는 것이다.시각적 이미지와는 달리 이야기의 형태를 띤 비애감은 옅어지지 않는다. 사진은특정 사건들도 대상화하며, 사진의 관찰은 관찰자에게 기억을 형성하고 추후 친숙함을 느끼게 한다. 비록 모든 기억은 개인적이며 재현될 수 없지만, 특정 사진의 관찰자에게 해당 사진에서 기록된 상황이 중요한 일이며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려주는 이야기로서의 집단적 교훈과 사진을 결합할 수 있다. 이렇듯 사진을 잘 활용하면 사람들의 반응을 잘 이끌어낼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기억한다는 것이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떠올리는 일이 됐으며, 사진만을 기억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진만으로는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역부족이다. 앞의 94p의 <처형 당하는 베트콩 포로>의 작가 애덤스도 대중에게 오해를 일으켰다면서 후회했다. 사회에 잔혹한 사진들이 넘치는 것은 우리 인간이 그 잔혹함을 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 애드먼드 버크, 바타이유 등을 통해 인간은 고통을 보는 것을 원한다는 생각이 새로운 것이 아니며, 고통을 담은 사진을 본 후의 반응이 꼭 도덕적인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진으로 고통을 인지시키는 것의 의미, 특히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 관찰자는 사진을 보고도 평소 무감각해져서, 때로는 공포와 무력감 때문에 단순 연민으로 끝날 뿐 행동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행동하는 것이 꼭 더 나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사진에서 올바른 행동으로 이어지기 위해 사진의 영향력의 한계를 이해하고 우리가 사진을 대하는 태도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사진은 대중매체와 결부함으로써 그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대중매체가 세계의 전쟁, 공포를 전달함으로써 사람들은 공포에 더 익숙해졌다. 그리고 저자도 자극적인 이미지의 무차별 확산은 우리의 윤리적 판단 능력 혹은 현실 감각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게다가 다른 두 전쟁의 사진을 나열하는 것은, 관찰자로 하여금 두 고통을 비교하게 해 고통의 개인적 특성을 무시하게 한다. 그리고 단순 이미지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저자는 요즘 사람들이 기억 자체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사진을 천천히 살펴보고 음미할 만한 차분한 환경이 별로 없다고 한다. 이러한 점들이 사진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 큰 걸림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장에서 직접 고통받는 개인을 본다고 해서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도 저자는 부정한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 고통받는 개개인에 대한 이해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색인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사진이 관찰자를 올바른 행동으로 이끌기 위해, 고통을 받는 자들과 그것을 고통없이 볼 수 있는 우리는 동등한 인간이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돼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을 우리의 과제라고 선언한다. 저자는 이렇듯 사진이 지닌 정보 전달의 불완전성, 고통을 사물화한다는 특성 등을 설명하면서 단순히 기억, 연민을 넘어서 더 깊은 이해에 대해서 적어도 사색해야 함을 주장하며 나 또한 그 의견에 동의한다. 물론, 저자의 주장처럼 사진을 보고 사색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데, 우리가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하지만 개인이나 한 사회가 특정 타인, 집단의 고통을 줄이는 것에 가치를 둔다면, 고통받는 타인을 단순히 기억하는 것을 넘어 사색, 그리고 행동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의 주장이 꼭 전쟁 사진에 한정될 필요가 없다. 주변에도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많다. 그들의 사진을 보고 왜 그 어려움을 겪는지, 이를 해소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사회 구성원들이 생각하는 사회가 될 때, 서로의 입장을 더 존중하고 협력적인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왜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을까? : 전곡선사박물관장이 알려주는 인류 진화의 34가지 흥미로운 비밀
이한용
이 시나리오는 이한용 전곡선사박물관장이 해당 전시관의 투어 가이드를 맡게 되었다는 가정 하에 가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저번에 진행되었던 강의와 질의응답에 베이스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글 속에서 등장하는 워딩이나 의견이 이한용 관장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입구안녕하세요, 저는 전곡선사박물관장을 맡고 있고, 부업은… 약팔입니다. (웃음) 농담이고요, 인간 역사의 신비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끔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오신 여러분들 모두 100만 년 전 지구에서 활약했던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여기가 어딘지는 다들 아시죠? 네, 연천군 전곡리입니다. 여기서 휴전선까지 불과 10여 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죠. 이런 자리에서 동아시아 최초의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와 함께 여러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박물관도 유적의 중요성에 따라 발굴과 동시에 같은 장소에 건립된 것이고요. 정말 제가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여기보다 조금만 위에서 발견됐어도 우리는 이 유적을 발견할 가능성이 아예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함께 이 기적의 현장을 직접 보시겠습니다. # 뗀석기 유적 발굴 현장주먹도끼는 가히 도구의 혁명과도 같았습니다. 오늘 저와 관람하게 될 여러 유적 중에서도 중요도 면에서 단연 톱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강조하는 이유는 잠시 후에 알아보도록 하고요, 우선은 이 주먹도끼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당시에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부터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주먹도끼는 구석기 시대에 사냥이나 채집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생존 활동에 아주 광범위하게 사용됐던 인류 최초의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석기 사람들은 이 주먹도끼를 단순히 사냥 같은 일을 위한 도일로만 사용하지 않고, 여러 가지 추상적 의미로도 사용했습니다. 일례로 여기 있는 이 주먹도끼는 무덤에서 같이 발견됐는데, 검사를 해 보니까 실제로 쓰인 적이 없던 거였어요. 그러니까 이건 오로지 동족의 무덤에 넣기 위한 목적만으로 제작된 도구라는 거죠. 더 이상 도구가 도구가 아닌 셈이 된 겁니다. # 주먹도끼 전시장제가 주먹도끼를 정말 가장 중요한 유물로 생각하는 건, 이것을 기점으로 인간이 도구를 바라보는 시각이 폭발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주먹도끼를 통해 인간은 단순히 어떤 일차적 목적을 위해 도구를 만드는 단계에서 벗어나 도구를 위한 도구를 만들고, 또 도구를 위한 도구를 위한 도구를 만드는 단계에 이르렀죠. 그러한 사고의 발전을 통해 호모 사피엔스만이 인간 종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했고, 전 지구로 퍼지게 되었죠. 또 중요한 건, 이 주먹도끼에는 당시의 인간들이 갖고 있던 예술적 감각까지도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돌을 대충 깨서 써도 기능은 충분할 텐데, 왜 굳이 이렇게 예쁘게 깎았을까요? 당시 사람들이 주먹도끼를 단순한 도구로만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이 주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의가 있고, 저도 여러분들께 예상이라는 점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최소한 저는 주먹도끼가 당시 인간들의 예술 감각을 반영했다는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 옵시디언 조각 전시장이건 구석기 유적에서 출토된 옵시디언 조각입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상당히 섬세한 테크닉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구석기 시대의 기술력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정교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이죠. 그런데 이렇게 신기한 현상이나 사실이 발견됱 때마다 어디서나 등장하는 세력이 있죠, 바로 유사과학입니다. "이렇게 정교한 조각을 만드는 일이 그 시절의 기술만으로 가능하냐?" 얼핏 듣고 보면 맞는 말처럼 들리죠. 그런데 무언가 레퍼토리가 항상 비슷하지 않나요? 지구평평론도, 육각수도, 5G 관련 루머도 다 이런 식이었죠. 무언가 신기할 법한 사실에 그럴듯한 말을 붙여내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조합니다. 그런데 정작 진실을 알고 나면 그들의 이야기는 그저 허무맹랑한 외침으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지구 평평론이 완전한 낭설로 취급된 것에도 나사의 위성사진이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처럼 말이죠. # 시네마실이건 당시의 기술만을 가지고 옵시디언 덩어리를 얇은 파편으로 쪼개는 일을 재현한 영상입니다. 보시면 통나무의 틈에 옵시디언을 꽂고 돌로 잘 내려치면 아까와 같은 모양으로 부서지는 걸 보실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아까 그 낭설에 경도된 채로 우리 박물관에 찾아왔던 관광객 한 명이 있었는데, 다짜고짜 저를 찾더니 이 유물이 조작이라고 주장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이 영상을 보여줬습니다. 그러더니 한 마디도 못 하고 그냥 가더라구요. (웃음) 이런 낭설에는 이렇게 명백한 증거로 대응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죠. 두번째 영상은 제가 직접 주먹도끼는 깨 보는 걸 찍은 겁니다. 지금 보시면 장갑 말고는 따로 안전장치를 안 한 채로 깨고 있죠. 당시 사람들에게 안정장치가 어딨겠어요, 그냥 저렇게 깨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이 뗀석기를 만드는 작업 자체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죠. 지금이야 저러다 다치면 병원 가서 엑스레이 찍고 붕대 감으면 그만이지만, 저 때 당시에 병원이란 게 있었을 리가 없죠. 그래서 당시에는 이 주먹도끼를 만드는 일이 가히 생명의 위협을 걸고 하는 일이었던 겁니다, 그런 점이 저희 같은 고고학자들에게 더 의미 있는 점으로 다가오기도 하죠. # 마무리오늘 제가 설명드릴 부분은 여기까지고요, 저희가 개관 10주년을 맞아가지고 여기 관람실이랑 안내 같은 걸 디지털로 바꿨습니다. 그래서 저 없이도 충분히 유적들의 배경이라든지 역할이나 중요성 같은 것들을 느끼실 수가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한다고는 했는데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구석기 시대 사람이 홀로그램처럼 나와서 당시 생활상을 재현하는 프로그램도 완성될 거라서 그때 한 번 더 와 보시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수백만 년 동안 살아남아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 여러 가지 자연의 신비와 우연이 겹쳤던 덕분인 만큼, 인간이 가장 우월한 종족이라는 식의 생각에 대해서도 재고할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가 오시기 상당히 외진 지역이니까요, 이번의 오신 김에 최대한 많은 것들 보시고 인간에 대한 자의식을 다시 한 번 돌아보시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가이드는 여기서 마치겠고요, 남은 부분 잘 관람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사×과×책 - 복잡한 세상을 횡단하여 광활한 우주로 들어가는
문병철.이명현 지음
런던에서 겨울왕국 뮤지컬을 보며 느낀 점 나는 여행을 다닐 때마다 성공적인 사진을 성공적인 여행과 동의어로 간주하고 몸을 혹사시킨다. 이번 여름, 나의 첫 유럽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무겁고 비싼 카메라와 부속 장비를 짊어지고 하프마라톤 이상의 거리를 걸었다. 여행의 시작은 영국 런던이었다. 첫 끼로 3만원짜리 피쉬 앤 칩스를 먹고 영국에서 미식 여행을 하겠다는 생각은 단념하고 주로 편의점 샌드위치로 식사를 싸고 빠르게 해결했다. 대신 얻은 시간과 열정은 카메라가 흡수했다. 덕분에 타워 브리지, 빅벤, 런던 아이 등 런던을 대표하는 관광지를 담았다. 남는 건 사진과 외로움이었다. 일몰 사진을 찍느라 늦은 저녁으로 2파운드짜리 샌드위치를 씹어 먹으며, 별로 기대하지 않고 네이버 유럽 여행 카페를 통해 같이 다닐 사람을 구했다. 그런데 나랑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분께서 연락이 왔다. 참 예뻤다. 특히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의 단발머리가 설렜다. 아쉽게도 서로의 관심사와 일정을 구체적으로 의논하다 보니 정작 함께 다닐 시간이 마땅히 없어 보였다. 그 분께서 다음날 뮤지컬을 봐야 해서 동행이 어렵다고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이 여자를 시간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만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나는 우연을 인연으로 만들기 위해, 원래 전혀 볼 계획이 없었던 '겨울왕국' 뮤지컬 티켓을 뒤늦게 샀다. 그리고 영화관에서 겨울왕국을 보았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갔다. 아름다운 겨울 풍경은 디즈니의 첨단 컴퓨터 그래픽으로만 구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화려한 장면을 위한 의상과 도구들이 놀라웠다. 더불어 '안나' 역할을 맡은 배우의 노래 실력이 정말 대단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와중에 그녀와 신나게 공연을 극찬하며 수다를 떨었다. 아마 그때의 감동은, 늘 그랬듯이 사진을 계속 찍으러 여행을 다녔다면 결코 느낄 수 없었을 감동이었을 것이다. 여자 만난 이야기 하느라 서론이 길었다. "그냥 읽으면 된다." <사×과×책>을 읽으며 이런 조언이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글의 전개는 나의 예상, 그리고 희망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나마 가장 반가웠던 구절은 좋은 책이란 현재 읽고 있는 책이라는 구절이었다. 분석은 훨씬 날카로웠다. 저자는 두리뭉실한 추측에 근거해 자기 말이 맞다고 주장하는 무당이라기보다는, 독자의 혈액을 채취한 다음 병명을 알려주는 의사 같았다. 특히 "객관적이라거나 가치중립적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입장을 숨기거나 모호하게 뭉개는 경우" 병에 걸린 환자를 많이 본 모양이다. 더불어 "양비론에 그치지 않고 책임감 있게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하고 논리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처방은 탁월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그냥 읽으면 될 것 같은 책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작위적인 방법으로 읽으라고 권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책 후반부의 "우리는 이렇게 책을 읽는다" 장은 국어 점수를 잘 받아야 하는 초, 중,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독서 토론 학원의 광고 전단지 커리큘럼을 보는 듯 했다. 어쩌면 그냥 읽으면 된다는 내용만 채워서는 그럴싸한 두께의 책을 만들어 팔아 돈을 벌 수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공감한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냥 책을 읽으면 된다고 주장하는 독서 토론 학원 선생보다 우리가 설계한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권하는 학원 선생이 더 많은 학부모들의 지갑을 열게 할 것이다. 이런 회의감을 해소하지 못하고 수업에 참석했다. 나는 4인 토론에서 그냥 과학책을 읽으면 되지 않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재우 학생의 답변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인공지능이 강화학습을 할 때 이미 갖고 있는 계산된 데이터로만으로 최선의 전략을 세우기를 반복한다면 머지 않아 한계점에 도달하고 더 이상 학습을 시켜도 정확성이 증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90%만 기존의 데이터를 활용하고 10% 정도는 랜덤의 데이터를 바꿔 넣어 전략을 세운다면 전자보다 더 높은 정확성을 갖는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전자는 언뜻 보았을 때는 최선의 전략 같아 보여도 그것보다 우수한 전략을 놓치게 결과를 낳고 (즉 Local maximum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 후자가 실제로 최선의 전략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즉 Global maximum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 더 똑똑한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를 인간의 학습에도 도입할 수 있다. 자신의 경험과 소신만 100% 고려하여 의사 결정을 내린다면 영감을 얻고 성장할 기회를 놓칠 수 있다. 열에 하나 정도는 자신의 고집을 굽히고 우연한 기회와 남들의 조언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혼자 여행을 다니면 좋은 점이 분명히 있다. 마찬가지로 혼자 책을 읽으면 좋은 점이 분명히 있다. 내 생각이 만장일치라는 것이 혼자라는 점의 최고 장점이다. 하지만 외부에서 비롯된 동기 부여가 더 나은 해답을 안겨주기도 한다. 영국 런던에서 본 겨울왕국 뮤지컬이 줄곧 사진만 찍어서는 얻을 수 없는 다른 느낌의 즐거움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여행을 다닐 때 다른 사람의 의견에 따라 다니는 시간을 꼭 넣을 생각이다. 솔직히 이 수업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카이스트 입학 후 대부분의 독서인 평가를 전제로 한 전공 서적 읽기에 너무 지쳤고, 이 수업은 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시험에 나와서, 독후감을 써야 하니까 읽는 책이 아닌 그냥 읽고 싶어서 읽은 책을 다 읽었을 때의 뿌듯함은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여전히 나의 취향은 혼자 사적인 책을 읽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과×책>과 수업에서 소개된 조언을 받아들일 생각이다. 누군가에게 생각을 보여줄 생각으로 책을 읽을 생각이다. 특히 양비론과 양시론은 항상 경계할 생각이다. 더불어, 앞서 냉소적인 어조로 독서 토론이 학생들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비유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사실이 결코 아니다. 다만 사회가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나이가 들수록 사회는 나에게 실력을 키울 시간적 여유를 주기보다는 실력을 발휘하기를 요구한다. 친구들과 같은 책을 읽고 수다를 떨 기회가 어렸을 땐 많았는데 언젠가부터 희소해졌다. 카이스트에서도 모국어로 된 책을 읽고 토론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 그래서 같은 책을 읽고 스무 명 남짓한 지성인들(심지어 그 중엔 때때로 저자도 있다!)과 부담 없이 토론할 이런 기회가 정말 반갑다. 이런 기회가 인터넷에 수많은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에서도 사람들이 비싼 등록금을 감수하고 대학교에 가려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낭만은, 아쉽게도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여행 직후 그녀와의 연락은 두절되었다. 0고백 1차임, 1타수 무안타. 나는 야구 방망이를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삼진 아웃을 당한 타자의 심정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진에 미처 여행을 다니던 내가 런던에서 아이들이나 볼 법한 뮤지컬을 본 것은 제법 의미 있는 기억이었다. 적어도 이번 수업에서만큼은 내 마음대로 혼자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기보다는 옆사람과 함께 평소 보지 않던 뮤지컬을 보는 마음가짐으로 과학책을 읽고자 한다.
MIT 테크놀로지 리뷰 코리아 Vol. 9 [2023]
MIT 테크놀로지 리뷰 편집팀
설국열차를 스크린 밖으로? 영화 <설국열차>의 스틸컷. CW-7의 살포 장면. 봉준호 감독 영화 <설국열차>는 지구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한 인공 냉각제 'CW-7'를 공중 살포하며 시작한다. 그런데 한 번 살포하면 제어할 수 없는 인공 냉각제의 효과는 과학자들의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다. 기대와 달리 지구는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로 얼어붙었고, 최후의 인류가 최후의 열차에 올라탄다.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던 기술인 태양지구공학을 다룬 기사가 MIT 테크놀로지 코리아 잡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영화 설국열차에서는 CW-7의 원리가 자세하게 나와 있지는 않지만, 이 기사에서는 태양지구공학이란 태양열을 우주로 반사해 지구 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기술로 정의했다. 태양지구공학은 이제 걸음마 단계이다. 특히 잡지에 인용된 '2009~2022년간 태양지구공학 연구 논문 출간 횟수'를 저자 국가별로 분류한 통계에서 소개된 17개국 가운데 대한민국의 이름이 빠진 것은 우리나라가 해당 분야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영화 속에서 치열한 논쟁 끝에 CW-7을 살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걸음마 수준에 불과한 이 기술에 이미 많은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잡지에서는 구조적, 태생적으로 태양지구공학은 많은 논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기술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가장 큰 원인은 기술이 사용될 경우 동의 없이 인류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고, 한 번 화학물질이 살포된다면 가역적으로 지구 환경을 되돌리는 것이 기대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특정 사기업이 기술의 발전을 책임진다면 기술에 대한 평가가 공정하지 않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니 대기업은 '적응적 혁신'이라고 불릴 수 있는 에너지 효율의 향상, 친환경 기술의 비용 절감 등에 집중하고, 정부는 민간에게 불편함을 감수하는 절약 정책을 장려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심리이다.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사업가 루크 아이스먼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비행기 운항에 사회적 합의가 부재했듯이 지구 냉각 물질의 살포에도 사회적 합의가 불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사회는 인간의 편리한 삶을 대가로 부작용의 일종으로 배출하는 온실가스와 지구온난화 그 자체를 막기 위해 방출하는 화학물질을 다르게 받아들일 것이다. 언뜻 기사를 보면 잡지가 단순한 사실과 여러 사람의 인터뷰를 열거하며 태양지구공학 기술의 찬반 논쟁을 향한 지루하며 기계적인 중립을 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연구는 기술이 제기하는 우려뿐만 아니라 해당 기술을 제대로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한 지역사회와의 대화를 바탕으로 시작되어야 한다'라는 마무리되는 기사는 이 연구의 방향성을 적절하게 제시했다. 바로 지금 필요한 것은 기술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사회의 관심, 그리고 사회의 관심을 유도하는 태도이다. <20세기 기술의 문화사> 우리는 가트너의 과장광고 주기를 다루었다. 이 책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언급이 부재했던 점은 다소 아쉬웠다. 아마 훗날 <21세기 기술의 문화사>라는 책이 출간된다면 기후변화를 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설국열차는 지구를 차갑게 만들기 위한 기술적 시도의 비관적 극단을 상상했다. 설국열차 말고도 <인터스텔라>, <월-E> 등의 영화에서 황폐화된 지구를 떠나는 인류의 미래를 담고 있다. 과장 광고 주기의 X축은 시간으로도 볼 수 있지만, 시간이라는 한 축은 새로운 지식의 발견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어떤 기술에 대해 팩트체크가 이루어지면 극단적인 비관론과 낙관론은 소멸한다. 아직 우리는 태양지구공학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영화는 무지에서 비롯된 공포로 관객을 동원했다. 인류가 태양지구공학 기술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진다면 낙관론과 비관론의 간극은 좁아질 것이다. 비유를 통해 다른 접근을 할 수도 있다. 지구를 기대수명이 얼마 남지 않는 환자라고 보는 것은 무리한 비유가 아니다. 환자와 건강한 사람은 다른 전략으로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에게 건강한 식사와 운동만을 원론적으로 권유한다고 안 낫던 병이 낫는 경우는 드물다. 부작용이 없는 약은 없다. 부작용을 감수하더라도 약을 먹어야 하고, 약이 들지 않는다면 새로운 기술의 임상실험을 고려해야 한다. 수십 년 전부터 알고 있던 원론적인 해결책에 의존하였지만, 지구의 병은 악화되었다. 그렇다면 일단 새로운 치료법을 알고자 노력하고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태양지구공학 기술에 대한 관심이 다른 친환경 기술 발전을 촉진할 수 있다. 하나의 병을 두고 보통은 여러 치료법이 경쟁 구도에 놓인다. 경쟁은 발전을 가져온다. 효과는 늘리고, 고통과 부작용은 줄어드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바늘 없는 주사기가 각광받는 것이 적절한 예시이다. 마찬가지로 태양지구공학 기술에 대한 우려를 동기로 삼아서 더 적은 리스크를 동반하며 지구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기술이 발전할 것이다. 또한 태양지구공학 기술에 한정 지어서 이야기해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이 기사에서는 화학 물질을 살포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어쩌면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되 언제든 태양광 차단을 철회하는 인공위성을 도입할 수도 있다. 따라서 지금 태양지구공학에게 필요한 것은 인공지능, 자율주행 자동차, 최신 스마트폰을 향한 기업과 정부, 민간의 관심만큼의 관심이다. 설국열차 영화가 세상에 나온 지 10년이 지났다. 영화를 근거로 여전히 신기술의 도입을 꺼릴 수는 없다. 영화를 인용하며 독후감을 시작했기 때문에 나 스스로에게 총을 겨눈다는 느낌을 씻을 수 없지만, 걸음마 단계 기술의 현실이다. 이번 기사에는 태양지구공학에 대한 별다른 데이터가 실려있지 않았는데, 이전 기사[1]에 따르면 연구진은 1g의 입자가 1톤의 이산화탄소를 상쇄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데이터는 반갑다. 다른 기술이 그렇듯이, 데이터의 맞고 틀림을 떠나 데이터를 동반한 논쟁은 태양지구공학 기술의 발전을 부를 것이다. 기사의 논지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연구진은 더 많은 데이터를 동반하여 사회의 관심을 이끌어야 하며, 반대론자들이 영화나 상상이 아닌 그 데이터를 통해 기술을 비판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태양지구공학 기술이 위기의 인류가 언젠가 꺼내 들 여러 카드 중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알기 위한 시도를 장려해야 한다. 출처[1]https://www.technologyreview.kr/a-startup-says-its-begun-releasing-particles-into-the-atmosphere-in-an-effort-to-tweak-the-climate/
니콜라 테슬라 평전
Carlson, W. Bernard
테슬라가 틀린 게 아니라, 연구가 그렇고, 인생이 그렇다. 니콜라 테슬라 평전은 여러 평전이 그렇듯이, 테슬라라는 개인 자체를 이해하며 평가할 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그것에만 매몰되어 테슬라의 공과 과를 분석하여 성공한 사람, 혹은 실패한 사람인가를 따지는 것은 앞서 시사했듯이 지나치게 좁은 시야로 책을 읽는 것과 같다. 오히려 이 책은, 세상에 대한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여러 진리를 재확인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유독 많은 명언, 고사성어, 속담이 떠올랐다.첫째로 이는 보상이 큰 일은 성공하기가 어렵고 쉬운 일은 보상이 적다. 평전의 저자 W. 버나드 칼슨은 환상을 올바로 다루는 것이 테슬라와 그의 후원자들에게 힘든 과제였고, 현대의 발명가와 기업가도 똑같은 어려움을 겪는다고 정확히 짚었다. 어떤 발명이 실현 가능성만 보인다면 진기하지 않아 가치가 없어 보이고, 반대로 너무 훌륭해서 사실 같지 않은 발명이라면, 투자자들은 위험하다고 생각해 투자를 꺼린다는 것이다. 경제학적으로 설명하면 수익률은 높다면 리스크가 크고, 리스크가 낮다면 수익률이 낮은 것과 같다.비범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니콜라 테슬라가 불우한 말년을 보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무선 전력 전송 기술을 완성하지 못한 채 지나치게 많은 투자금을 거대한 탑인 워든클리프를 건설하는 데 소진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약 무선 전력 전송이 성공했다면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아니, 세계가 달라졌을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무선 충전 기술이 스마트폰을 비롯한 휴대용 전자기기에 널리 상용화되었는데, 이마저도 접촉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충전기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전자제품을 놓아야 충전이 된다. 오늘날에도 테슬라가 상상했던 방식의 무선 송전은 실현이 요원하다. 현재에도 실현되지 않은 기술을 발명하지 못했다고 한 세기 전 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평가이다.특히 테슬라가 일생을 바쳐서 했던 것이 바로 다른 일이 아니라 '연구'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의 상황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연구란 그 누구도 답을 알려주지 않는 문제를 푸는 일이다. 연구는 실패의 연속이다. 시간과 돈, 노력이 문제를 저절로 해결해 주지 않는다. 성공한 많은 과학자들조차도 연구의 어려움을 설파한다. 테슬라의 삶은 연구의 어려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성공적인 연구를 해내더라도 그것이 연이은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둘째로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인정은, 조금 더 포괄적인 언어로 다시 말하자면 개인의 성공과 사회의 성공은 일치하지 않는다. 오늘날 위인이라고 불리는 적지 않은 역사 인물들은 살아 있을 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사후에야 재평가를 받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수한 예시가 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핍박을 받아 346년 만에 사과를 받았다. 그레고어 멘델은 죽고 나서 도서관에서 발견된 그의 논문이 유명해지면서 유전 법칙의 선구자로 인정받았다. 빈센트 반 고흐 또한 성공을 만끽하지 못하고 생전 단 한 작품만을 팔았다. 반대로 사회로부터 역적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행복한 삶을 살다가 죽은 사람들도 많다. 독재자나 친일파는 전부 혹은 거의 대부분의 일생 동안 부와 권력을 누렸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겼다. 수업에서는 니콜라 테슬라에게 실책이 있음을 전제하고 의견을 표출한 학생들이 많았다. 그러나 불행한 말로의 원인을 테슬라 자신의 독단으로 간주한 것은 지나친 결과론이다.물론 테슬라의 삶과 테슬라가 사회에 미친 영향을 성패의 개념으로 판단하는 것은 심하게 이분법적이다. 그러나 평전을 쓴 저자마저 테슬라가 에디슨, 마르코니와 달리 20세기 후반 역사책에 들어가진 못한 이유를 정당화하는 듯한 논조로 비평한 것은 흥미롭다. 그는 테슬라가 큰 기업을 만들지 못했고, 냉전 시대 미국 사회에서 유용한 인물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테슬라는 개인의 입장에서 대단한 발명을 해냈지만 20세기 미국이 성장할 수 있었던 기틀이 기업 주도적 자본주의, 그리고 반공주의였음을 고려했을 때 테슬라의 성공을 미국의 성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점에 공감한다. 역으로 테슬라 덕분에 사회는 현대적인 전기 시스템을 누릴 수 있었는데 본인이 부를 누리지 못했다는 점을 근거로 완전히 반대의 결론을 끌어낼 수도 있다. 아무튼 어떠한 방식으로 해석하더라도 개인의 성공과 사회의 성공이 일치되기를 우리는 희망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지만, 세상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사후 가족들의 기억에만 남고 영원히 잊힌다. 반면 테슬라는 젊은 시절부터 대중과 학계로부터 주목과 인정을 받았다. 자기장의 단위, 세르비아의 국제공항, 세계에서 가장 시가총액이 높은 자동차 회사에서 그의 이름 테슬라를 찾을 수 있다. 사람을 죽이지 않고, 그리고 독재를 하지 않고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의 인생은 충분히 성공한 인생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역사 인물과 비교하였을 때, 테슬라 본인에게 실책이 있어서 궁핍한 노후를 보냈다기보다는 연구와 인생 본연의 불확실성이 테슬라의 손을 들어주지 못했다. 개인에 대한 비평은 이 정도로 짧게 마치고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미국 사회의 상황을 고려하며 좁은 관점에서는 연구라는 것이 어떤지, 더 넓은 관점에서는 인생이란 어떤 것인지 고찰해 보면 이 평전을 통해 더 많은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